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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One

w. 파편 (@xofragmentxo)

김종대는 특별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이 나라에서 김종대를 모른다는 것은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거나 있을 이유도 없는 간첩이라는 소리였다. 그 애는 출생부터 전례가 없는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 다음 달이면 열일곱이 되는 오늘날까지 세상의 주목을 받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통치자의 아들도, 그 어느 유명인사의 딸도 김종대 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김종대는 누군가의 아들이나 누군가의 무언가 따위로 주목받는 게 아니라 김종대라는 그 존재 자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빛나는 별이고 마스코트이며 모두의 아이돌. 마지막 말은 곧 비유가 아니라 정말이 될 거다.

 

세상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보다 색을 보는 쪽과 보지 못하는 쪽으로 나누는 것에 더 익숙해진지 오래, 해가 흐를수록 색을 보는 아이가 태어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색을 보는 사람이 있어야 그들과 이어진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색을 볼 수 있었다. 적어도 부모 중 한 명이 색을 볼 수 있어야 그 자녀도 색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 수가 줄어든다는 건 그만큼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뜻이고, 점점 더 많은 색맹이 생겨날수록 세상 또한 색을 잃을 테였다. 그러니까, 이 일은 아주 중대한 사태였다. 낡고 고약한 정략결혼이 다시 고개를 디밀기 시작했다. 색을 보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욕망에 눈이 멀어 제 아이를 팔아넘기듯 결혼시켰다. 색맹을 줄이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은 채 이혼율만 치솟아갔다. 색을 보는 아이의 납치 사건도 줄을 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는 납치된 아이들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불과 며칠을 간격으로 그 수가 한없이 늘어나곤 했다. 사람들은 웃음을 잃었다. 불안에 시달렸고 의심이 늘었다. 누군가는 사회가 퇴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서 태어난 김종대는 단지 태어나 자지러지게 우는 그 순간 기적을 일구어냈다. 색맹인 부모에게서 색을 보는 아이가 태어났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기적적인데, 정말 그 애를 기적의 상징으로 만든 건 그 애의 다른 부분에 있었다. 김종대는 소리를 통해 색을 '전염'시켰다. 종대의 색은 울음소리를 타고 의사와, 간호사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어머니와, 아무튼 그 근처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우연히 들은 사람들의 귀에 전해지며 스며들었다.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그 애의 어머니였다. 처음 마주하는 피의 색에 놀라버린 걔 어머니께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기절해버리신 것이다.

 

그리하여 태어난 9월 21일의 김종대, a.k.a 기적의 아이(물론 걔는 이 별명을 끔찍해한다). 우렁찬 울음소리 하나로 신문에 얼굴도 찍히고 뉴스에도 나오고 각종 포털 사이트 메인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 한다면, 이미 sns에서 내가 걔 친구랑 아는데.. 식으로 시작하는 썰에서 다 까발려진 김종대 과거 시리즈 중 하나를 읽어서. 는 아니고, 내가 그 썰의 걔 친구격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니, 걔 친구 격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서먹해 보이지. 나는 그 특별한 김종대의 단 둘 뿐인 소꿉친구로 자랐다.

 

 

 

 

***

 

 

 

 

도경수와 김종대, 그리고 나는 흔히 말하는 엄마 친구 아들 사이였다. 친구의 엄마가 알고 보니 우리 엄마랑 친한 사람인 사이이기도 했고.. 뭐가 먼저인지는 사실 분명치 않고, 아무튼 그렇게 어릴 때부터 친했다. 김종대가 '기적의 아이'인 것 치고 걔는 어릴 때는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비교적 조용한 곳으로, 어린애들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데에 비해 동네 인구의 반절 정도는 어르신들 이었다. 그분들은 김종대의 목소리에도, '기적'에도 한결같이 그다지 관심 없고 놀랍지 않다는 반응들은 보이셨다. 자체가 한가한 동네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 똑같은 그때 또래 애들처럼 놀았다. 로봇이나 문방구에서 몇 백원 하고 파는 별 해괴하고 조잡한 장난감들을 쥐고 온 동네를 누비거나 누구네 집에 들어가 배 깔고 누워 과자 까먹으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하거나. 나랑 김종대는 말이 많고 도경수는 거의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여전히 내가 다섯 마디하고 김종대가 세 마디 더 보태야 대꾸를 하는 도경수. 그 땐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다 자라버린 얼굴로 딱딱한 침묵을 씹는 도경수는 가끔 좀 무섭다. 그래도 김종대 말엔 곧잘 웃었다. 똑같이 실없는 말에도 티가 나게 반응이 달랐다. 어쩌면 걔네 둘은 그때부터 이미 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좋다고 서로를 보며 실실 웃는 꼴에 어린 나는 왠지 모를 소외감이 들어 몸이 베베 꼬이기도 했으니까.

 

우리가 제일 자주 했던 놀이는 김종대의 말에서 퍼져 나오는 색을 입은 물건의 색 이름를 맞추는 것이었다. 도경수나 나는 색을 보지 못하는 처지여서, 늘상 색을 달고 다니는 김종대처럼 색의 이름을 외우는 데에 서툴렀다. 애초에 김종대랑 친해지지 못했다면 접했을 일도 없을 이름들 이었다.

 

"저건 무슨 색이게?"

 

김종대가 뭔가를 가리키면,

 

"파랑!"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내가 아무렇게나 외치고,

 

"..하늘색."

 

좀 더 신중한 도경수는 뜸을 들이다가 정답을 말했다. 항상 나보다 도경수가 많이 맞췄다. 빨강, 초록, 파랑 같은 기본적 스펙트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달리 걔는 파랑 중에서도 물색이 있고 하늘색이 있으며 하는 걸 그새 다 깨치고 다음 번 그 놀이를 할 때쯤이면 이번엔 초록색에는 뭐가 있고 하는 걸 다 외워놓았다.

 

야 넌 경수 반이라두 좀 해봐. 놀이가 다 끝나면 김종대는 나에게 쿠사리를 먹였고 나는 천장보고 누운 몸을 뒤집고 너나 사람이름 가려 부르지 말라고 했다. 소모적인 부스러기들. 김종대의 웃음에는 노란색으로 물드는 물건들이 많았다. 김종대 티셔츠, 도경수 손에 반창고, 내 양말.. 좀 나중에 알게 된 팝콘이란 것도 노란색인데다 톡톡 튀면서 만들어지는 게 김종대 웃음소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팝콘 같은 김종대 웃음소리.

 

 

 

 

***

 

 

 

 

조금 나이가 들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김종대는 이 시대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사람 속에 파묻혀 다녔다. 색맹인 애들은 물론 색이 보이는 애들까지 '기적의 아이'를 보려고 옆반 윗반 심지어는 다른 학년에서도 우르르 김종대를 보러 갔다. 끊임없이 본인을 김종대에게 어필하는 사람이 반, 김종대에게 끊임없이 말을 시키는 사람이 반. 그 짓거리가 질리지도 않는지 시간이 지나도 무리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아무 말이나 해봐!"

"아무 말?"

"그냥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빨리!"

 

붙임성 좋은 여자애들은 처음 보는 김종대 에게도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그럼 김종대는 정말 아무 말이나 했다. 김종대 입에서 한 두 마디 튀어나오면 다섯 배로 높아지는 함성, 김종대 웃음소리에 다시 튀어 오르는 환호 소리. 어느 정도 김종대의 능력에 익숙해지고 소꿉친구 부심도 있던 나는 걔네들을 기적에 목에 메인 애송이들이라고 부르며 허세를 떨었다. 그럼 김종대는 또 팝콘 같은 웃음을 터트리고, 도경수는 나한테 커다란 눈을 흘기다 피식 웃었다.

 

하루가 끝나면 김종대는 다 지쳐버렸다. 우리는 못들은 척 했지만 김종대네 엄마는 몇 번이나 이사 갈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도경수랑 나는 일부러 더 김종대를 싸고돌았다. 결국 김종대가 전학을 가는 일은 없었으니 수작이 먹혔던 것 같다. 김종대는 그새 말이 줄었다. 얼마 전만 해도 고만고만하게 말 많고 시끄럽단 얘기를 듣던 처지였는데, 김종대는 초등학교에 가더니 애가 의젓해졌다며 어른들이 앞 다투어 칭찬했다. 그러면 김종대는 소리도 안내고 웃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광경이었다.

 

도경수는 다 바보들이라고 했다.

 

"걔는 그냥 힘들어서 그러는 거야."

 

어른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른다고 말을 이었다. 색 말고도 도경수가 나보다 훨씬 잘 아는게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게 김종대 였다. 분명 똑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걔는 세 배 정도 아는 게 많았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하면, 눈만 흘겼다. 비밀이 아니라 보물을 숨긴 것처럼.

 

우리는 덩달아 말이 줄었다. 원래도 말이 없던 도경수와 반 토막 정돈 조용해진 나. 그리고 지친 김종대. 누구네 집인지도 기억이 안 나는 어느 날에 김종대 옆에 앉아있던 도경수가 그 애 손을 잡았다. 김종대는 미동이 없었다. 그러다 가만히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엮었다. 모든 순간에 그 어떤 말도 없었다. 나는 슈퍼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먹으며 어린 청춘 영화 찍고 앉은 걔네를 봤다. 켜진 TV에서 영화가 돌아가는데 그걸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우의 목소리는 창밖의 매미소리처럼 퍼졌다. 유일하게 김종대의 말 없이도 색을 띄는 김종대의 검은 눈이 가려졌다 뜨이길 반복했다. 우리의 눈꺼풀이 순서라도 맞춘듯 차례대로 깜빡였다. 벌써부터 말보다 눈빛이 많았다.

 

그 날 저녁을 시작으로 도경수와 김종대는 줄곧 손을 잡고 다니는 습관을 들였다. 눈치를 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둘의 일탈이 어색해 죽어나가는데, 두 사람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얼굴로 태연히 굴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도경수와 김종대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익숙해진 뒤엔 나조차 무엇이 이상한지 느끼지 못했다. 수시로 손을 잡고 다니는 두 소꿉친구. 한 발자국 쯤 뒤에서 보면서도 조금 큰 도경수의 손과 조금 작은 김종대의 손이 맞대어 쥐면 꼭 맞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부터 이랬어야 옳았다는 듯이. 그렇다고 둘 사이에, 그 둘과 나 사이에 어떠한 관계의 변이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셋은 여전히 나란한 친구였고, 도경수와 김종대를 떼어놓고 봐도 그 정의는 여전했다. 둘은 손을 잡는 이상으로는 절대 하지 않았다. 옛날처럼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일도 없어졌다. 그저 손만 쥐고 다녔다. 말이 없는 손들. 나는 자주 둘이서 앉아있던 소파를 떠올렸다.

 

 

 

 

***

 

 

 

 

김종대네 집에 있다 보면 수시로 전화소리가 들렸다. 대개 방송국에서 오는 전화였다. 어린 셀렙을 출연시키는 어린이 방송이기도 했고, 기현상 및 기인들을 취재하는 프로이기도 했다. 김종대네 부모님은 아들의 의사(김종대는 대부분 "엄마 맘대루 해"라고 했다)를 먼저 물은 뒤 내보내거나 보내지 않거나 하셨다. 나는 도경수와 붙어 김종대가 나오는 방송을 봤다. 남들보다 쪼그만 애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웃으면 TV에서 늘 보는 연예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놀라워했다.

 

"태어나서 처음 색을 봤어요.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네요."

 

최근 흥행한 영화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배우가 말했다. 사회자가 대꾸한다, 과연 기적의 아이라고 불릴만 하네요. 화면 왼쪽에 뜬 로고에도 부제목으로 <기적의 아이>가 적혀있었다. 곧 화면이 바뀌며 김종대의 짧은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왔다. 몇 년도에 출생이며, 어떤 동네에서 자랐고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등. 배우나 아이돌의 프로필을 정리해주는 모양새였다. 간간히 우리랑 찍었던 사진도 나왔다. 나와 도경수는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 되어있었다. 나는 실없이 웃었다.

 

머리가 크고 키가 자라며 김종대는 아주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방송에선 '나이가 들며 성숙해지는'이라는 표어를 써댔다. 귀염성 있던 얼굴이 준수한 방향으로 자라자 영화에서 카메오 제의가 들어왔다. 그것도 도경수랑 보러갔다. 김종대는 또 예능 프로에 초대된 날이었다. 나오는 시간을 다 합쳐도 10분이 될까 말까한 분량의 김종대는 주인공의 어린 남동생이었다. 음모에 빠진 주인공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알려주고 수학여행을 간 그 애는 사건이 일어나는 사흘내내 제주도에 있다 잘 돌아왔다는 전화로 안도의 한숨을 이끌어내고 역할을 마무리지었다. 영화 중간에가 팝콘을 집어먹다 도경수의 얼굴을 봤다. 주인공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팝콘을 입에 집어넣다 흘리고 그걸 찾는다고 난리를 피웠다. 무슨 일이냐는 눈을 하는 걔 표정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잠깐 내가 잘못 본건가 싶었다.

 

영화는 대박이 났다. 스토리의 탄탄했지만 인기에 김종대가 한몫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몰려드는 애들은 더 늘어나고 그만큼 수군대는 애들도 많았다. 그 애는 표정을 꾸미고 조절하는 법을 뒤늦게 배웠다. 학교나 화면에서 보는 얼굴은 항상 웃었지만 우리 앞에선 지친 얼굴을 했다. 운적은 없지만 입 꼬리도 올리기 힘들어 보였다. 김종대의 그늘. 혹은 그림자. 그것들은 짙어질수록 밝은 면도 선명하게 한다. 여전히 김종대는 인기가 많고, 기적을 일으키고, 웃음을 이끌어냈다.

 

 

 

 

***

 

 

 

 

고등학교 때 반이 갈리고 다른 친구를 사귀기 시작하면서 나는 둘과 조금 멀어졌다. 여전히 집은 가까웠고 하교 방향도 같았지만 우리들은 더 이상 동네를 휘저으며 놀 수 있는 어린애들이 아니었으므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새무리를 얻은 나와 달리 도경수와 김종대는 여전히 둘끼리만 붙어 다녔다. 말을 트고 다니는 애들은 있는 모양인데 정작 교실을 훔쳐봐도 복도에서 마주쳐도 둘이서만 있었다.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새 친구 사귀기 귀찮나부지. 김종대야 오는 사람 쳐내기도 피곤해하고. 도경수는, ..도경수는?

 

둘의 반을 지나갈 때마다 책상 위에 서로를 꼭 쥔 손이 보였다. 김종대의 말소리가 문을 넘어 들려왔다. 창틀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색이 벽을 타고 번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복도까지 퍼진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멈추게 했다. 그쯤에 새로 사귄 친구 녀석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재촉할 때까지 퍼지는 색을 따라 눈을 옮기다 눈 앞까지 온 신발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너 대체 뭐하냐?"

"형 머 봐요?"

 

커다란 덩치 둘이 나란히 따라붙는다. 1년 더 늙은 애랑 1년 덜 먹었는데 똑같이 길쭉한 애. 뒤늦게 아니라며 손사래 치며 가려는데 덜 먹은 애가 창문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어! 소리쳤다.

 

"김종대다!"

 

제 3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 이름이 얼마나 생소하던지. 태어나서 김종대란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처럼 어색했다. 덜 먹은 애 말에 더 늙은 애도 창문에 눈을 바싹 붙였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니까.. 징그러워.

 

"헐. 진짜네. 우리 학교 다니는 줄 몰랐어."

"나두나두. 사진빨 못 받네. 실물이 훨 났다."

"쟤 목소리 들으면 색이 보인다잖아. 너무 궁금했어."

"난 그냥도 색 보이는데."

"야 나 지금 니 슬리퍼 색 뭔지 알아."

 

늙은 애가 주머니에서 뭘 뒤적여 꺼내더니 덜 큰 애가 신은 슬리퍼와 번갈아 보았다.

 

"이거 핑크색이지."

"나도 아는데."

"말 예쁘게 안하냐."

"즐."

"나 쟤랑 소꿉친구다."

 

눈알 두 쌍이 이번엔 내 쪽을 향한다. 아니 진짜로, 징그러워. 손으로 옆에 앉은 도경수를 찝었다.

 

"옆에 얘랑, 김종대랑, 나랑. 어릴 때 맨날 붙어 다녔어."

"진짜? 옆사람은 첨보는데."

"어어, 나도."

 

둘은 이제 김종대 옆의 도경수를 본다. 우리 셋 다 키는 도토리 키 재기인데 도경수는 분위기만 부쩍 자랐다. 어느 샌가 걔 혼자 어른이 되어있다. 나이답지 않게 묵직하더니 나이를 먹는만큼 자꾸 묵직해졌다. 속내를 넣어두는 금고는 해가 갈수록 함께 컸다. 김종대와도 멀어지고 나니 도경수는 아주 먼 사람 같기도 했다.

 

눈알들은 내 말을 더 기다리는 듯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일부러 모른 척 그 눈빛들을 피해 눈을 굴렸다. 어쩐지 더 말하기 그랬다. 김종대는 이미 수많은 입에서 오르내리고, 거기에 도경수까지 편승시킬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무심코 또 그놈의 소꿉친구 부심을 부린 것 같기도 하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더 말을 했다간 둘의 어떠한 '분위기'에 대해서 말하게 될 기분이 들었다.

 

혹여 잡은 손을 눈치 챌까 먼저 걸음을 돌렸다.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고 뒤에 남은 둘을 재촉했다. 잡은 손을 숨기고 있지도 비밀로 하지도 않았는데도 어쩐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사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고등학생의 연애 관계로 설명하기엔 긴 세월과 복잡한 사정들이 많았다.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론 부족했다. 책 한권을 다 뒤져도 이거다 싶을 말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나에게 무어라 더 물으려는 순간에 종이 쳤다. 나는 미련 없이 반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손을 잡은 둘을 두고. 사진처럼 찍힌 순간이란 게 있다.

 

 

 

 

***

 

 

 

 

오랜만에 셋이 모이게 됐을 때 김종대는 가수를 하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정확히는 아이돌. 볶음밥을 퍼서 입에 잔뜩 욱여넣으며 뱉은 말이 휴지 좀 달라는 말로 들렸다. 건네받은 명함은 이미 몇 차례 유명 아이돌을 배출한 대형 회사였다.

 

"아이돌?"

"웅."

"너 캐스팅 된 거야?"

"우리 축제 영상 봤대."

"너 노래 부르던 거?"

"경수야 나 휴지 좀."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이는 도경수는 이미 알고 있단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앞으로 보기가 힘들어지겠구나 싶었고, 남은 도경수를 생각했다. 어느샌가 나는 둘을 세트처럼 생각하고 있어서,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 학교 이제 안 나와?"

"아니이.. 안 나오는 건 아니구. 자주 빠지긴 할텐데 가기는 해."

 

이번엔 우연으로 도경수와 눈이 마주쳤는데, 도경수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시던 물을 뱉을 뻔 했다가 무사히 넘겼다. 그런데 다 넘긴 건 아니라서,

 

"..웨엑."

"드럽게!"

 

 

 

 

***

 

 

 

 

그리하여 김종대는 학교에 코빼기도 안보였다. 가기는 한다더니 아주 안 오는가 싶었다. 몇 달도 안 되어 데뷔 소문이 돌았다. 또 sns는 난리가 났다. 나는 하던 것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소문인지 진짜인지 알고 있을법한 도경수는 조용했다. 내가 보내는 연락엔 "바빠"와 "이따가"라는 답장만 수두룩하게 돌아왔다. 나는 다시 도경수와 다녔다. 김종대가 방송에 나가고 영화 촬영을 하러 가던 그 때와 같았다. 대신 나는 예전처럼 조용한 분위기를 깨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걸었다. 둘이서 했을 법한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없던 동안. 내가 멀어져있던 동안. 유대 이상의 무언가로 분명히 변화한 너희에 대해.

 

생각은 하면서도 물을 기회는 없었다. 침묵의 무게가 나 혼자 감내하기엔 너무 커져있었다. 말 한 마디 하는 걸로는 금도 안 갔다. 김종대는 이걸 어떻게 버텼을까. 어렸을 땐 나만큼이나 조용한 걸 못 견뎌 했는데. 매일을 아무 것도 묻지 못한 채로 갈라서길 반복했다.

 

"날 좋아했대."

"뭐?"

 

그런데 오늘은 다른가보다. 도경수가 먼저 말을 다 하고.

 

잠깐, 뭐?

 

"누가?"

"종대가."

 

가던 발이 멈췄다. 그럼 둘이 사귀고 있던 건가? 정말로 관계가 변한 것일까. 꺼내는 말을 고르기에 신중해졌다.

 

"그럼.. 너네 둘이 사귀어?"

"안되겠다고 했어."

"왜?"

"안되니까."

 

이런 상황만 아니면 그리웠을 거다. 서론 없이 본론부터 치고 들어가는 도경수식 화법.. 하지만 본론만 들었음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김종대가 도경수에게 고백을 했는데, 도경수는 받아주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안된댄다. 왜 안 되니. 뭐가 안 되니. 곧 죽나?

 

"너 죽어?"

"무슨 헛소리야."

"난 니네 둘이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나 니가 무슨 소리 하는지 점점 모르겠거든."

 

도경수가 우뚝 멈춰섰다. 나보다 두세 걸음 앞서 걷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지금 가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한다면, 그 때 영화관에서 봤던 주인공의 얼굴을 또 볼 것 같았다. 말이 이어졌다. 지금은 종대한테 중요한 때니까.. 그러면 안 돼. 그제야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 알아먹었다. 지금은 김종대가 자신의 일을 찾은 시기고, 그것을 준비하는 시기니까, 연애하느라 그 애 마음이 해이해지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아주 도경수 다운 생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집으로 가려 갈라서는 길에 '잘 가' 한마디만 덧붙였다.

 

 

돌아온 집의 거실엔 라디오가 커져있었다. 노래 하나를 고작 아는 잘 모르는 외국 밴드의 노래가 소개되는 중이었다. And true love waits... 축축하고 느리다. 돌아가는 도경수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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