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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불꽃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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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내용은 프랑스어입니다.

얼마 전부터 이마가 간지러웠다. 그 ‘얼마 전’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를 피해 도망간 이후부터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들춰보니 마치 지구 면적에서의 인간 크기라고 표현을 해도 될 만큼의 작은 크기로 점이 하나 나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5분 동안이나 실눈을 뜨며 살핀 후에야 그것이 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화장실 조명은 이상하리만큼 붉었다. 한국에서의 정육점 조명이라고 표현해도 될만큼 붉었다. 갈색 빛의 점은 붉은 조명에 의해 갈색보단 적갈색을 내보였다. 앞머리를 들추고 있던 손을 내렸다. 멍하니 화장실 거울 속 내 자신을 바라보았다. 생기 없는 얼굴에 어울리는 약한 모습이 보였다. 두 손으로 삐쩍 마른 볼을 쓸어내렸다. 낯선 땅에서의 적응은 꽤 어려운 것이었다.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던 크기의 점은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크기를 키워갔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글자의 형상을 띄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정확한 위치도 잡히지 않아있던 점은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앞머리를 손으로 넘기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을 거뒀다. 여전히 얼굴에는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적응은 여전히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다. 얼마 전과 똑같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을 대가로 받는 ‘고통’이라 마음을 먹자 돌아오는 것은 ‘질식’이었다.

 

 

잠식

w. 최이한 (@chen_lh_)

[덕분에 잘 먹었어요.]

[부탁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줘요.]

 

집 주인인 아만다(Amanda)는 착한 사람이다. 낯선 땅 프랑스에 도착한 나를 아들처럼 챙겨주며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삼시세끼를 제공해주었다.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내자 그녀는 테이블에 올라 있던 그릇을 챙겨 부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른 배 위를 만지작거리며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아무 목적 없이 테이블 위를 바라보고 있자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아들 로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빈은 고작 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그 나이 때 아이들답게 무지의 순수를 가져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던 그날, 로빈은 내게 입꼬리를 만져도 되겠냐 물었다. 아만다는 그런 로빈을 제지하며 내게 사과를 했다. 전혀 불쾌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굉장히 미안한 뜻을 가진 것 같았다. 나는 딱히 불쾌함이 없었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쾌하다는 표현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현관문에 서서 한동안 머쓱한 공기가 맴돌 때, 로빈은 내 바지자락을 붙잡으며 사과를 했다. 나는 로빈의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푸른 눈의 반짝임이 나를 향했다. 나는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로빈은 내 눈을 응시하더니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CHEN!]

[응?]

[이건 뭐예요?]

 

잠시동안 과거를 회상하느라 잊혀졌던 로빈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가리켰다. 나는 작게 아. 하고 탄식하며 로빈의 손가락이 향해있는 곳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원래는 앞머리를 내리고 생활했지만 긴 앞머리가 눈을 찔러 머리를 위로 묶었던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얼버무리려하자 로빈은 오리처럼 입술을 삐쭉거리더니 옷깃을 끌어당겼다. 얼른 대답을 해달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를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뒤에서 로빈의 칭얼거림이 들렸지만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아만다에게 부탁해 조명을 바꾼 화장실은 하얀 빛이 감돌았다. 슬리퍼를 신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들어온 화장실 거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이마에 그려진 이름을 보곤 작게 탄식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던 것을 참고는 비틀비틀 욕조에 몸을 기댔다.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마에 그려진 이름이 뜨거웠다.

 

D.O.

 

도망쳤다 느꼈던 질식의 수위는,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올라있었다.

 

***

 

아침부터 묘하게 머리가 아파왔다.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 머리통을 부여잡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방에 쳐져있던 커튼을 젖히자 바로 앞에 있는 오피스텔에 누군가 새로 이사를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저거 때문에 일찍 깼나. 영 찝찝한 기운을 없앨 수 없었다. 미간을 가득 찌푸리자 자는 동안 굳어있던 얼굴 근육들이 발악하며 구겨졌다. 빠르게 커튼을 다시 치고 등교 준비를 했다. 꿈자리가 사나웠기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못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가장 먼저 앞머리를 들춰보았다. D.O. 며칠 전보다 글자가 더욱 선명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들췄던 머리카락을 다시 떨어트렸다. 서둘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될 시간이었지만 왠지 서두르고 싶었다. 정신없이 바쁘면, 다가올 운명을 조금이라도 외면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찬장에 들어있던 아스피린을 한웅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첸, 오늘이 마지막 등교인가요?]

[네. 아마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 올 것 같아요. 늦게 되면 연락할게요.]

[저런. 이렇게 특별한 날에 늦으면 많이 섭섭할 것 같은데.]

[그럼 우리 오늘 저녁은 파스타야?]

[쉿. 로빈, 첸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렴.]

 

로빈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파스타였고, 그 음식은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닐 때는 아만다가 잘 해주지 않았기에 로빈은 언제나 푸른 눈동자를 밝게 물들이며 기대 아닌 기대를 내게 내걸었다. 로빈은 아만다의 허벅지 정도 오는 키를 자랑하듯 시선을 위로 하여 내게 인사했다. 내 손바닥만치 작은 그의 손이 빨리 돌아오라는 재촉이 가득한 배웅을 건넸다. [그럼 다녀올게요.] 로빈의 머리통을 손으로 쓰다듬어주다가 꾸벅 인사를 마치곤 계단을 내려왔다.

 

 

도망치듯 온 프랑스는 갑작스럽게 도망친 나라치곤 좋은 풍경을 자랑했다. 프랑스행 비행기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내내 했던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프랑스는 정말로 좋은 나라였다. 프랑스에 온 첫날, 눈에 보이는 아무 바(Bar)에 들어가 인사불성하게 취해버렸던 나는 바텐더 제인(Jane)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난 겁쟁이였고, 겁이 너무 많아 도망을 쳤다고. 초면인 남자의 하소연을 듣던 제인이 왜 많고 많은 나라 중에 프랑스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한모금가량 들어있던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할 줄 아는 외국어가 프랑스어뿐이었어.]

[이유가 겨우 그것 때문이야?]

[그리고,]

[그리고?]

 

하고 이야기했다. 제인은 어서 뒷이야기를 해보라는 눈빛으로 컵을 닦던 손을 멈추고선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잔을 들어 입 안으로 남은 술을 털어 넣고는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제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매력적인 붉은 머리가 아름다웠다.

 

‘프랑스는 질리도록 가봐서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 신물이 날 정도니까. 내가 태어나고 지금 이맘때까지 자랐다는 게 놀라울 정도야.’

 

그림자 진 그의 뒷모습이 이야기했다. 고개를 창문으로 돌리고 있어 옆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덤덤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또 잔잔했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만큼 그 사람이 싫어하는 나라였거든.]

 

그리고 이후의 기억이 없다. 눈을 뜨자 어느새 새벽과 아침의 경계를 알리는 빛과 어둠이 바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내부엔 아무도 없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곤 테이블에서 머리를 떼어내자 바로 옆에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색이 바래 노란빛에 가까운 종이 안에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 해봐요. 당신은 그럴 수 있어요.]라는 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낡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종이를 구겼다. 새로운 삶이라. 종이 옆에 함께 놓여있던 30유로(한화 약 4만원)을 챙겨들고 도망치듯 바를 빠져나왔다. 이젠 일상이 된 몸짓이었다.

 

바에서 빠져나오자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왔다.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곤 주변에 널려있는 가로수 밑에 속을 게워냈다. 욱욱거리며 먹은 거라곤 술밖에 없는 속을 게워내자 눈물이 삐져나왔다. 갑자기 모든 게 비참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게워낼 것도 없는 속을 위로하며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몸을 앉혔다. 멍하니 빛과 어둠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한겨울이었던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따듯했다. 이러다 확 죽는 게 낫겠다싶어 눈을 감았다. 이렇게라도 그를 잊고 싶던 마음이 가득했다.

 

눈을 감고 곧 의식이 아득해질 때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무지한 감각 탓에 흔드는 것도 느끼지 못할 뻔했지만, 곧 뺨을 때려오는 격정적인 행동에 눈을 뜨고야 말았고 그곳에는 아만다가 로빈과 함께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정말 죽지 못해 살았다.

 

 

오랜만에 과거회상을 하며 걷자 어느새 횡단보도 앞이었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이 가득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한국에 있을때 자주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사람들이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휴대폰으로 노래의 음량을 조절하며 나 역시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 횡단보도 중앙에 멈춰 머리를 부여잡았다.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은 감해지긴커녕 배가 되어 날 괴롭혔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아 몸부림을 치자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정지선을 지키고 서있던 차들은 클락션을 누르며 도로에 공해를 더했다.

 

눈물이 핑 돌아 금방이라도 차가 달려오는 도로에 몸을 내던질까 싶기도 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던 바람은 눈앞에 보이는 깔끔한 구두에 산산조각이 났다. 구둣발이 눈에 보였을 때,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한발자국 더 가까워진 구두의 주인은, 무릎을 굽혀 내 얼굴을 잡고 자신을 보게끔 들어올렸다. 고통이 차차 피곤으로 바뀌었다.

 

하늘을 향해 빌었다. 부디, 부디 이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젖은 시야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슬프게도 내가 도망친 그날과 별다르지 않았다.

 

“찾았다.”

“…….”

“김종대.”

 

나는 그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1년? 아니, 반년도 안 걸릴 거야. 형식적인 단계니까 깊게 생각하지 마.”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김종대. 중요한건 내가 너에게 돌아가는 날이 한시라도 빨라야한다는 소리지.”

“…….”

“네임을 너무 생각하지 마. 어차피 이 관계에선 너와 나 사이가 가장 중요하니까.”

 

그, 도경수는 언제나 관계 후에 혼자서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늘 침대에서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거기까지가 우리의 ‘관계’였다. 대한민국의 경제가치 1위라 불리는 그룹의 오너 도경수는 짜인 각본처럼 약혼자가 있었고, 오는 봄에 결혼을 할 사람이었다. 그는 늘 약혼녀인 그녀가 그와 나 사이의 불청객이라 이야기했지만 불청객은 나였다. 도경수의 왼손 약지에 그려져 있는 네임은,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내가 아니었다.

 

넥타이를 골라달라며 양손에 들고 있는 넥타이를 내게 보인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아무런 말이 없는 내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주섬주섬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마지막으로 모자를 쓰려하자 도경수는 내 팔목을 잡고 자신을 보게 돌렸다. 평소와 다른 악력에 눈물이 돌았다. 꼭 그 악력 때문에 고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합리화하고 싶었다.

 

도경수는 아무런 말없이 매섭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시선을 피하자 그는 남은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돌렸다. 그리곤 입을 맞춰왔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놀림에 어깨를 밀어냈지만 애초에 대거리가 되지 않는 힘이었다. 결국 얼굴이 터질듯이 붉어진 후에야 그는 맞추던 입을 떼어냈다. 입을 맞추는 동안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경수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그를 뒤로한채 호텔 방에서 뛰쳐나왔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들었다간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를 사랑해서, 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아만다의 집이 아닌 낯선 호텔룸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누웠던 몸을 일으키자 도경수가 씻고 나왔는지 물기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눈을 마주하던 그는 침대로 다가와 얼굴을 쥐어 잡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온기는 여전히 따듯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단 한마디의 대화 없이 눈만 마주하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짝―.

 

그를 먼저 밀쳐낸건 나였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체향과 온기에 잠시 흔들렸지만 여전히 난 이 관계를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허용되는 건 사랑하는 마음이 전부였다. 그 이상으로는 인간인 나로서의 감정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위선의 허용 범위는 꽤 낮았고 약했다. 돌아간 고개를 여전히 가만히 내버려두는 도경수를 뒤로한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기립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서둘러 문으로 걸어가던 순간 뒤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어린 늑대의 목울림이 퍼졌다.

 

“김종대.”

“…….”

“종대야.”

“…….”

“가지마.”

 

내 옆에만 있어.

 

자리에 우두커니 서 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다가 등을 돌리지 않은 채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경수씨. 제가 이 먼 곳까지 도망쳐온 이유가 뭐라 생각해요?”

“…….”

“무서워서요. 경수씨가 아무리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그 손에 쓰여 있는 건 제 이름이 아니었으니까요.”

“김종대.”

“그래서 도망쳤어요. 정해진 네임을 따라 당신이 날 떠날까봐. 또 내가 그 운명을 거스르고 있는 걸까봐.”

“…….”

“겁쟁이인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더 이상 날 운명으로 괴롭히지 마세요.”

 

잘 있어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그 말을 끝으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을 눌렀을 때,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석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토했다. 마치 그런 그를 위로하듯 최상층에서 일층까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또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빌어먹을 그의 네임은 여전히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또 다시 도망을 선택했고, 턱 끝까지 차올랐던 질식의 수위는 머리끝을 뒤덮었다.

 

***

 

[CHEN.]

[네.]

[이젠 어디로 갈 거야?]

[아무래도 시골 외곽에서 작은 꽃집을 할 것 같아요. 가게도 계약했거든요.]

[꽃? 갑자기 웬 꽃?]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꽃을 좋아해서요.]

 

제인은 컵을 닦던 헝겊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곤 살짝 웃음을 그리자 그녀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내게 클럽소다를 건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컵을 들어보이자 [마지막 작별 선물.]하곤 다시 컵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호의에 감탄하며 클럽 소다를 들이켰다. 제법 맛있었다.

 

바 문까지 배웅을 해주던 제인은 내게 포옹을 하더니 작별 인사라며 볼에 짧게 입맞춤을 하곤 떨어졌다. 생긋 밝은 웃음을 지어보이자 제인은 마음에 드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멀어지는 내게 시내에 놀러올 때 꼭 들리라는 말을 건넸다. 나는 멀어진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의 붉은 머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르세유로 떠나는 버스를 타기 전 문득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날 이후로 그에게서는 연락도, 또 만남도 없었다.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네임이 새겨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두통은 사라졌고 또 그 역시 내게서 사라졌다. 의자에 앉아 땅바닥을 응시하자 점차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굵은 눈물이 뚝뚝 바닥을 적셨다. 이곳 프랑스로 도망을 친 것은, 어쩌면 그에게서 도망 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아주길 원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싫어 도망쳤다 변명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가 좋아하는 꽃을 잊지 못해 평생을 꽃에 둘러싸여 살 준비를 끝마쳤다. 비참해진 내 모습이 싫어 입술을 물었고, 여린 입술이 뜯어져 붉은 핏덩이를 토했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붉은 장미 두 송이만 주세요.]

[어떤 분께 선물하시려구요?]

[아내와 결혼기념일이에요.]

[축하드려요. 예쁜 사랑하세요.]

 

예쁘게 포장한 장미 두 송이를 건네자 남자는 푸른 눈동자가 무색하게 붉은 볼을 밝히며 값을 지불한 뒤 가게를 빠져나갔다. 찾아온 적막에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느새 마르세유는 겨울을 맞이했지만 한국처럼 눈이 오거나 춥지는 않았다. 마르세유는 온화한 편에 속해있었다. 덕분에 꽃이 살아가기엔 적합한 날씨였다. 찌뿌듯한 허리를 펴며 꽃장을 열었다. 꽃냄새가 물씬 풍겨와 기분이 좋았다.

 

상한 꽃들을 골라내며 콧노래를 부르자 가게 안 분위기가 확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골라낸 꽃들을 꽃병에 꽂으며 향을 맡는데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서둘러 고개를 들어 반가운 인사를 하려다 몰려오는 두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소름이 돋아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시야에 익숙한 구두가 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구두의 주인을 확인했다. 저번보다 많이 야윈 것 같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네.”

“…….”

“이렇게까지 안쪽에 있는 줄 몰랐어.”

 

도경수는 내게 한걸음 가까워졌다. 몸이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깜빡이며 다가오는 도경수의 얼굴을 확인할 뿐이었다. 거의 코앞까지 다가온 도경수는 나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파혼했어.”

“……네?”

“널 위해,”

“…….”

“난 모든 걸 포기했어.”

“경수씨.”

“이제 나한테 너밖에 안 남았어.”

 

너 없인 죽을지도 몰라.

 

나는 말없이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던 내게 딱 한 가지 남은 것은,

 

“사랑해.”

 

도경수, 그 하나뿐이었다.

 

그의 왼손 약지엔 더 이상 그녀의 이름과 반지가 아닌, 흉터와 함께 익숙한 네글자 ‘CHEN’이 적혀있었다.

 

나는 들어가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깊은 어둠속으로 결국 스스로 잠식해버렸다.

아아, 나는 그가 갉아먹는 나뭇잎이었구나.

 

 

 

 

 

 

잠식(蠶食) - 누에가 뽕잎을 먹듯이 점차 조금씩 침략하여 먹어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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