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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은 오늘도 깜깜했다. 처음엔 한 발자국 내밀기도 무서웠던 어둠 속에서 종대는 익숙하게 무대 중앙을 향해 걸었다. 동그랗고 단정한 종대의 머리 위로 핀 조명이 켜지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야 했다. 조명과 대비되어 더 깜깜해진 관객석으로. 어디에 앉아있는지도 모를 ‘그분’ 에게.

 

종대가 작게 숨을 한번 내쉬고, 음악이 들리면. 박수 소리도, 마이크도 없는 조용한 소극장 안이 오롯이 종대의 목소리만으로 채워졌다.

 

 

 

 

 “종대 너, 원래 가수가 꿈 이랬지?”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일이었다. 앨범이라도 내주시게요? 뜬금없는 실장님의 질문에 종대는 대본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웃었다. 소속 돼있는 연예인 이라고는 다 배우밖에 없는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어디서 제 예전 인터뷰라도 읽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실장님이 그래, 하고 대답하기 전까지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읽고 있던 페이지를 표시도 하지 않고 접었다. 너 가수 시켜주겠다고.

 

“갑자기 왜….”

“…너 앨범 내주고 싶다는 분이 있어.”

 

어려운 말이 이상하게 바로 해석됐다. 아, 나도 이 바닥 물 헛 먹은 건 아니구나. 뿌듯함 보다는 씁쓸한 웃음이 자꾸 나왔다. 그거 앨범만 내주겠다는 소리 아니죠. 순식간에 종대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아니야. 실장님의 표정도 진지 해졌다. 대기실 안에 꽤 긴 정적이 이어졌다.

 

골치 아픈 건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누가 이런 제안을 했는지 대표님도 몰랐다. 즉, 어디서부터 어떻게 내려온 지시인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으며, 이것은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전제조건은,

 

“종대 네가 노래를 하는 거야.”

 

거기에 따른 방송 활동은 전적으로 너의 의견을 따른다고 하셨어. 실장님의 목소리가 누군가와 자꾸 겹쳐 들렸다. 저 깊숙한 어느 한구석에 꽁꽁 숨겨 놨던 사람을, 자꾸 끄집어내게 한다. 울컥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종대가 눈을 감았다. 이런 식으로 가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종대야, 노래 해줘서 고마워.’

 

내가 노래를 할 때 가장 환한 웃음을 짓던 너에게.

 

 

 

 

너의 노래가 되어

디오x첸

 

 

 

 

[ 매주 금요일 6시, 노래는 한 곡만 준비하시면 됩니다. ]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저장 되어있지 않은 번호로 오는 전화나 문자는 종대의 일상이나 다름없었지만, 이 문자는 보자 마자 알 수 있었다. 아, 그거 구나. 답장을 해야 하는지 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으려던 찰나에 문자 하나가 또 도착했다. 회신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주소는 당일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가 일방적인 관계라는게 느껴져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게 훨씬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주연이보다 더 신경 써주는 것 같네. 스폰 아닌 스폰을 받기로 한 후부터 실장님은 물론 사장님까지 지나치게 종대의 눈치를 봤다. 걔 질투하겠다. 회사에서 예민함으로는 최고로 손 꼽히는 여배우 얘기를 하며 종대가 웃었다. 주연이도 이런 거 하나. 종대를 따라 어색하게나마 같이 웃으려던 사장님은 애써 못 들은척했다.

 

“노래는 정했어?”

 

금요일인 오늘 묻기에는 너무 늦은 질문 아니에요? 화제를 넘기고 싶은 걸 종대는 알면서 꼭 집었다.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구를 탓하고 싶지도 않아요. 전 날 술에 취해 미안하다고 전화를 걸어온 실장님에게 한 말과는 다르게. 종대는 애써 더 짖궂게 웃어넘기고 싶었다. 점점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The Last Time 부를 거예요. 학교 다닐 때 자주 불렀었어요.”

“혼자 연습하기 괜찮았어? 트레이너 필요하면 말하고.”

“… 이 노래는 괜찮아요.”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이 노래는 은 뭐야.”

 

내내 방긋거리던 종대가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궁금해하는 사장님을 위해 종대 대신 실장님이 나섰다.

 

고등학교 때 좋은 트레이너 하나 있었잖아요. 쟤 첫사랑. 저 예전에 있던 회사에서 종대랑 같이 아이돌 준비하던 애였는데, 네임 발현 돼서 회사에서 쫓겨났어요. 그 뒤로 종대한테도 연락 한번 없이 사라졌어요.. 왜 그때만 해도 네임 있는 애들은 잘 안 뽑으려고 하던 시절이었잖아요. 경수 없으면 가수 안 할 거라고 울고불고 하는 김종대 잡아다가 연기 시킨 거잖아요, 제가.

 

그만하세요. 은근히 자기 자랑하듯 말하는 실장님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종대가 끊었다.

 

“제 앞에서 경수 얘기 함부로 하지 마세요.”

 

평소엔 들을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를 한 종대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서도 하지 마시고요.

 

 

 

 

 

차에 타자 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종대를 운전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자꾸 힐끔댔다.

 

“…괜찮아?”

“괜찮아요. 가요, 이제.”

 

벌써부터 약해지면 안 되는데.

 

오늘 같은 날, 경수를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이런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러 가는 길엔 더더욱. 경수와 함께, 수백 번은 더 불렀을 노래를 선곡한 것부터 모순인 것을 알면서도 종대는 당당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네가 생각나지 않는 노래는 없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엔 기다렸다가, 나중엔 화가 났다. 어떻게 간다는 말 하나 없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는지. 노래가 좋았고 가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아니었다. 경수가 함께 하지 않는 노래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엔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경수는 종대의 노래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노래 그 자체였다. 10대의 종대에게는.

 

이제 종대는 경수를 기다리지 않았다. 추억 하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어떻게든 살아는 지더라. 다만 한가지, 종대가 유일하게 바라는 게 있다면, 너도 괴롭기를. 딱 나만큼만 아팠으면. 종대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주였다. 가지 말라고 매달려 잡아 볼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 너에게. 너를 볼 수 없다면 나를 보게 하게 할 게.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해져서, 어디를 둘러봐도, 네 앞에 내가 있기를.

 

아침에 연락이 왔던 주소의 아트홀이 가까워질수록 종대가 마음을 다잡았다.

 

 

 

“김종대씨 혼자 들어가셔야 합니다.”

 

공항에서나 한 번씩 보던 검은 옷의 아저씨들이 소극장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취향 이상한 아줌마 있으면 어떡하지 형. 오면서 기분이 좀 풀린 종대가 평소같이 농담을 했다. 아저씨 아니면 다행이지. 받아주는 매니저가 있어 다행이었다. 갔다 올게. 들어가는 뒷모습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지만 누구보다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요번 주는 춤 춰볼까?”

 

어디 도살장에 끌려가듯 들어갔던 처음과는 다르게 이제 종대는 금요일이 돼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제는 진심으로 장난도 칠 수 있었다.

 

몇 달째 소극장 안에는 아저씨는커녕,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게 조용했다. 누가 보고 있는 건 맞아요?! 이제는 제 경호원들 같은 덩치 큰 아저씨들을 붙잡고 징징거려도,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종대는 이제 매주 부를 노래를 고르지 않아도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내 앨범에 내 곡을, 저번주부터 트랙별로 연습 중이었다.

 

“이렇게 경계심 없는 거 보면 걱정도 되고,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거 보면 넌 노래를 했어야 하는게 맞는건가 싶기도 하고.”

 

요 며칠 녹음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종대의 저녁을 사들고 온 실장님이 말했다.

 

“그런 얘기는 속으로 해주실래요?”

“넌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얘기해줄래?”

 

자기가 먹으라고 해놓고서는. 종대는 궁시렁대면서도 입에 있는 샌드위치를 꼭꼭 씹어 삼켰다.

 

“나는 모르겠다.”

“뭐가요?”

“불러다가 인기척 한번 안 내고 노래만 듣는 그 사람도 모르겠고, 공기가 어쩌네 저쩌네 하면서 마음 놓고 있는 너도 모르겠다.”

 

얼마 전 사장님 앞에서 했던 말이었다. 공기가 편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지금 내가 위험한지 아닌지 공기로도 느낄 수 있잖아요, 사람은. 그때도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하고 계시더니 이제 와서 또 얘기를 한다.

 

“느낀 대로 더 말하면 아주 까무러치시겠어요.”

“뭐길래 그래.”

 

앉아있는 사람이 꼭 경수 같아요.

 

실장님이 마시고 있는 물을 뱉을 뻔했다. 경수였으면 하는 거겠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던 종대의 음반은 자켓 촬영 날, 예상치 못 한 일로 발목이 잡혔다. 첫번째 의상을 입는 것을 도우던 종대의 스타일리스트가 별안간 소리를 빽 지르면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종대의 등허리께 꽂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종대에게 사람들은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희미하지만 푹 파인 등 중앙을 따라 새겨진 세 글자.

 

점점 선명해지는 그것은 네임이었다.

 

 

 

 

 

“뭐라고 써있는지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자켓 촬영은 다음 일정도 잡지 못 하고 당장 취소되었고, 모두가 나간 현장엔 사장님과 실장님, 그리고 종대까지 세 사람만 남아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네임이 흠도 아니고, 오히려 네임을 가지고 있는 연예인들 중엔 일부러 살짝살짝 보여주며 여러분들이 제 소울 메이트 일수도 있다며 마케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여서 거울도 보지 못 하게 하고 이렇게 심각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지. 종대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말 안 해주면 휴대폰으로 찍어서 보면 되지.”

 

누가 막기도 전에 종대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집었다가, 놓쳤다.

 

도경수.

 

손에 힘은 커녕, 온 몸에 있는 피가 다 빠지는 기분.

 

도경수야. 지금 네 몸에 새겨져 있는 이름.

 

 

 

 

 

그래서 뭐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종대가 정신을 차렸다. 놀랍게도 침착한 말투였다.

 

“어차피 다른 사람일수도 있었던 네임, 경수면 뭐 어때서요.”

 

그럼에도 끝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는 종대만 알 수 있었다. 이런 일로 흔들려선 안된다. 몇 달을 공들여 준비한 앨범이고 시작부터 엄청난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만들 수 있었던 내 노래였다. 운 좋게 무늬만 스폰서인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 완성되기 직전인 앨범을 사사로운 감정으로 망칠 수는 없었다.

 

“…경수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도 있어.”

“네임만 가리면 문제없어요.”

 

한 차례 걱정을 덧붙인 사장님과 달리 한참을 말이 없던 실장님이 어렵게 입을 뗐다.

 

“경수의 네임을 본 적이 있어요.”

 

 

종대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경수의 몸에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가는, 그동안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은 얘기기도 했다.

 

“... 단순히 네임이 발현됐다고 쫓겨난 게 아니에요 경수는… 경수의 귀 뒤에… 종대의 이름이 있었어요.”

 

말도 안 돼. 놀란 마음에 급하게 일어나던 종대가 순간 고꾸라졌다. 정신을 잃던 그 짧은 순간에도 경수만큼은 선명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익숙한 천장이 눈앞에 보였다. 종대의 팔 한 쪽엔 링거가 꽂혀 있었다. 기사라도 날까, 쓰러져도 병원조차 가지 못 하는데, 데뷔를 앞둔 듀오 아이돌이 같은 멤버의 네임이 발현됐다면. 그때 당시 어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종대는 자꾸 눈물이 났다.

 

“제가 경수 많이 좋아하는 거 아셨잖아요…”

 

울먹이는 종대의 머리맡에서 실장님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니까 더 그랬어. 변명인 거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우리도 어떻게든 최대한 끌고 가보려고 했어. 잃는 것도 많겠지만 시작부터 이만한 화제성이 어딨어. 노이즈 마케팅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냐. 그렇지만… 경수가 너무 완강했어. 자기가 나갈 테니까 어떻게든 종대 모르게, 묻고서 너 혼자 데뷔하게 해달라고…”

 

자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던 종대가 결국 얼굴을 감싸고는 엉엉 울었다.

 

“너 노래 그만두고 연기하는 거 아마 경수가 제일 속상해 했을 거야... 그러라고 자기가 사라진 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몇 년을 참아온 말을 하며 실장님도 점점 감정이 격해지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종대는 깨달았다. 역시 너였다. 종대는 울컥할수록 최대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는 버릇이 있었다. 입술을 깨물면서. 지금처럼.

 

“…경수 맞죠?”

 

주어가 없는 말을 서로는 알아 들었다.

 

“데려다주세요. 오늘 금요일이잖아요.”

 

말릴 새도 없이, 종대가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뽑고는 방을 나섰다.

 

 

 

 

 

“저 발현된 거 경수는 아직 모르죠?”

 

아트홀 주차장을 나서며 종대가 물었다. 실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켓 촬영 때문에 늦게 도착한다고만 해놨어. 자켓 촬영을 하지 못 한 탓에 약속했던 시간보단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역시나 소극장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오던 그때보다도 더 긴장한 모습의 종대가 숨을 고르고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소극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간 실장님이 같이 들어가는 것 대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섯 번째 줄 중앙, 종대는 이 공연장을 알게 된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분’이 앉은 자리를 알았다. 객석이 얼마나 있는지, 의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이곳에서 보는 모든 게 처음인 종대가 유일하게 아는, 익숙한 경수에게 웃으면서 다가갔다.

 

다리를 꼬고 앉아 옆에 서있던 비서를 올려다보며 말하던 경수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놀라서 막아서려 하는 비서를 손짓으로 내보낸 경수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울면서도 웃는 건 여전하네.”

 

종대는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 눈물이 났다. 이제 경수와는 단 한 줄을 남겨놓고 있었다.

 

“…억울해.”

“뭐가.”

“너는… 너는 나 보면서, 나는 보지도 못 하게 하고…”

 

말이 끊길 때마다 쉴 새없이 종대의 눈에선 눈물이 방울져서 흘러내렸다. 지금도 놀라지도 않고. 너는 다 아는 동안 나는 뭐 하나 아는 것도 없이…

 

끝까지 먼저 내려오지도 않고.

 

입을 삐죽이며 흘깃 경수를 째려 본 종대가 나머지 좌석 한 칸을 밟고 넘어 올라갔다. 혹시나 넘어질까 경수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종대를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마주 보고 앉혔다.

 

“보고 싶었어.”

 

보고 있어서, 더 보고 싶었어.

 

자신의 목을 꽉 끌어안은 종대의 귓가에 경수가 속삭였다. 진심이었다. 하나뿐이었던 사랑과 꿈을 동시에 잃고 난 후, 정신없이 살기 위해 그동안은 관심도 없던 집안의 일을 배웠다. 그리고는 성공과 함께 뒤늦게 밀려오는 욕심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무대 위에 세우고 나니, 차라리 볼 수 없던 때가 더 나았을 정도로 너는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으며, … 경수는 마주 안은 종대의 허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안 아팠어?”

 

내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을 자리다.

 

“어떻게 알았어?!”

 

종대의 눈이 동그래졌다. 실장님이 분명 말 안 했다고! 놀라서 상체를 세운 종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 경수가 짧게 입을 맞췄다.

 

“내 허리가 따끔거려서 알았어. 아마 너보다 먼저 알았을 거야, 내가.”

 

이제 우리는 다 알 수 있어. 서로의 감정이나 아픔, 생각, 느낌...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거야.

 

“소울 본딩?”

“그래, 소울 본딩.”

 

종대도 경수를 따라 하듯, 경수의 오른쪽 귀 뒤를 매만졌다. 나의 이름이 있을 자리.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너를 위해 도망치고, 도망쳐도 결국은.

 

 

 

 

 

경수야.

왜.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맞춰봐!

…그런 건 몰라.

그래도오!!! 맞춰봐 한번.

음… 여기 불 끄고 싶다?

…순수했던 경수 어디 갔어?

넌 이게 무슨 뜻인 줄 알고.

 

사랑하자는 뜻.

 

 

 

장난스럽게 눈을 접으며 웃는 종대의 모습에 경수가 황급히 입고 있던 정장 안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을 찾아 내 비서에게 전화를 거는 그 새를 참지 못 하고 종대가 경수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여기 불, …다 끄고 먼저 퇴근하세요.”

 

어른이 된 경수의 탄탄한 가슴팍을 쓸어 내리며 종대는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을 귀 뒤도 혀로 쓸어 내렸다. 가녹음이 된 앨범을 먼저 들으며 경수는 후회했었다. 나만 듣고 싶다. 너의 전부 모두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 허리를 들썩이며 보채는 종대 때문에 통화 중간 소리를 참은 경수가 간신히 할 말을 다 끝내고는 휴대폰을 옆 좌석으로 대충 던졌다.

 

조용한 소극장이 매주 그랬듯 종대의 노래로 채워졌다. 이번엔 진짜, 경수만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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