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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몇 집이랬지."
"서른 네 가구입니다."
 
 
 
포장이 된 듯 되지 않은 어설픈 아스팔트 도로 위. 기어가듯 올라가는 고급 세단 뒷좌석에서 다리를 꼬고 헤드에 머리를 기댄 남자는 종일 시달린 듯 피로한 기색이었다. 부지 하나 해결하지 못해서 제 손에 다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건물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말고도 세상엔 피로한 일이 너무도 많았다. 죽지 못해 살만큼. 눈을 반쯤 슬몃 뜨며 달동네를 훑는 경수에게 노을의 커튼 그림자 아래 별 단서 없이도 꾀죄죄함이 드러나는 꼬마들이 공놀이를 하는 것이 보였다. 한때는, 저런 것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흑백의 무성영화 같은 삶은 지나치게 따분해 움직이는 것들이 필요했기에. 어린 시절엔 왜 아무도 체육대회에서 자신을 끼워주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안다. 다른 색의 조끼를 입은 팀을 구분할 수 없는 자신은 골칫덩이였다.
 
 
 
"전무님."
"아, 미안. 뭐랬지."
"저 위로는 두 가구가 전부입니다. 꼭대기까지 갈까요."
 
 
 
이제는 그다지 감상적이지도 않은 기억에서 돌아왔을 땐 꼬마들은 백미러 너머 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무릎 위에 놓인 성가신 서류들을 옆으로 치우고 우진의 말을 듣던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만 가자.
 
 
 
"다 버려진 빈집이네요. 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미간을 구기고 창으로 잠시 눈을 돌렸다 거두는 우진의 말에 잠시 생각했지만 어차피 저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경수는 석 달 안에 모두 합의하고 계약을 끝내야 했다. 감정을 살피지 않고 사람들을 몰아내어야 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공을 갖고 놀던 아까 그 꼬마들도 말이다. 동정심이 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도 않았다. 평생을 침체된 기운과 함께 먹고 자랐지만 그보다 더 별로였다. 꼭 시시껄렁한 조폭이라도 된 느낌이다. 애들 틈에 끼어 공이라도 던져 보려 애를 쓰는 짓을 때려치우고 책만 파던 샌님인 주제에. 회장직에 있는 작은아버지는 필요하면 조폭에게 의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충고했지만 일을 엎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무님. 그리고 목요일 저녁은 사모님께서 초대하신 식사 자리가 있습니다."
"...됐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어지간히 귀찮게 하네요."
 
 
 
맞죠? 핸들을 돌리던 우진이 고른 이를 보이며 픽 웃었다. 지루해 미칠 것 같은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도전무는 미간을 구기고 한숨을 쉬고 있다. 몇 안 되는 감정적인 표현이다. 이럴 땐 좀 제 나이 또래의 사람 같아서 더 놀리게 된다, 자꾸만. 사모님이자 도전무의 작은어머니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홀로 남게 된 어린 경수를 떠맡게 되었고 이제는 적당히 이름값을 하는 기업의 여자와 결혼시켜 대충 쫓아낼 생각으로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덕분에 관심 끄고 살고 싶은 제 상사는 이다지도 귀찮고 괴로운 것이고. 사실 경수가 만나야 하는 사람은, 세계 어느 곳에서 어떤 모양새로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Light, Night, Sight

w. 귤잼 (@time__lag)

말하자면, 도경수는 컬러리스로 진단받았다.
 
 
 
비비드 보균자가 나타나 눈을 밝혀주기 전까지 시각 감각 기관이 스펙트럼을 인지하지 못하고 명암으로만 세상을 감지하는 컬러리스. 탓인지 그는 감정도 채도가 낮았다. 신체적인 요인은 곧 심리적 요인이었다.
 
 
 
"전무님, 골목이 좁아 차를 돌릴만한 곳이 없는데요. 일단 직진하겠습니다."
 
 
 
고급 세단이 골목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을 시점, 꼭대기 두 집 중 하나, 그곳에 사는 종대는 신발 끈을 다부지게 묶고 있었다. 여섯 살배기 여동생이 유치원에서 얌전히 오빠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맞춰서 가기로 해놓고 고장 난 배수관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그만 늦어 버려 마음이 조급했다. 조금만 더 늦으면 삐쳐서 내일까지 말도 걸지 말라고 할 것이 눈에 선했다. 운동화 앞코를 땅에 툭툭 쳐 제대로 신겼는지 확인한 종대가 부실하게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한다. 바람 한 점 없이도 앞머리가 속절없이 흩어지도록.
 
 
 
죽은 동네나 마찬가지인 이웃한 풍경들을 스쳐 폭이 좁고 비탈진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노후화된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다. 도로를 가로지르려 했지만 급하게 가장자리로 빠져야 했다. 이곳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서 한 번 더 쳐다보고야 말게 되는 고급 자동차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피해 뛰며 종대는 마을을 밀어버리기 위해 최근 뭐 대단한 그룹에서 이주를 권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시던 날 밤, 돈을 많이 벌어 꼭 돌아온다고 잠에서 깨 몸을 일으켰던 종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저 아래에서 보리가 저를 기다리면서 견디는 것처럼 저도 마음 둘 곳을 기다리면서 견디는 것이다.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잘만 이야기를 나누던 경수가 머리를 감싸 쥐고 무릎에 엎드렸기에 놀란 것은 우진이었다. 별안간 앞으로 고꾸라진 경수도 당황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방금 뭔가가 지나갔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이 멀어버린 것 같이 한순간에 다가왔다 지나간 그 무엇은 설명할 단어가 없는 그런 느낌의 것이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경수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아무 변화 없는 흑백의 시야다. 분명히 눈이 멀 것만 같은 섬광을 본 것 같았는데.
 
 
 
 
 
 
 
-
 
 
 
 
 
 
 
그로부터 열흘 후 경수는 블라인드 젖힌 창 너머로 회사 앞에서 우뚝 서 있는 비썩 마른 남자 청년을 보았다. 혼자 시위라도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뭐 하는 사람이지?”
“재개발 지구 청년이라는데 계약서를 받고 찾아 온 모양이네요. 금방 돌려보내겠습니다.”
 
 
 
그 말과 달리 회사 아래가 시끄러웠다. 그 청년이 다짜고짜 들어와서 책임자 부르라며 한바탕 소동이 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까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보안실에서 잘 이야기해 보냈다고 들었는데. 소동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우진으로부터 다시금 금방 돌려보내겠다는 전달을 받았을 때는 무른 일 처리 방식에 화가 났다. 굳은 얼굴을 어떻게 해보려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있던 경수는 문득 그때처럼 눈에 압력이 오르고 심박이 제멋대로 뛰는 것을 느꼈다. 땀이 났으며, 갑작스런 두통을 느꼈다. 세면대를 짚고 관자놀이를 손목으로 툭툭 두드리던 그는 문득 거울 속의 모습으로 제가 색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물감이 확산되는 것처럼 잔뜩 처음 보는 현상이 흑백의 시야로부터, 번져가고 있었다.
 
 
 
경수가 제 손을 가만히 보았다. 제 피부라는 것은 이런 색이었다. 시선을 거두고 경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근차근 공간을 뜯어보는 그는 더 이상 무미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잘 꾸며진 화장실은, 인테리어 탓에 상당히 단조로웠지만 분명히 색이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경수는 다른 곳과 다르게 유독 채도가 짙게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검은 구두를 떼고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엇이든 놓치지 않기 위해 티크 색의 문을 짚고 밀어 문 안쪽을 확인하며 걷다 꾹 닫힌 하나의 문 앞에서 멈추었다. 아마도 여기일 테다. 손을 들었다. 아까보다 짙어진 손을 확인한 경수가 중지를 말아 쥐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목이 탔다.
 
 
똑똑.
반응 없는 안쪽 상황에 다시 한 번 두드렸을 땐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경수는 조심스럽게 문을 슬쩍 밀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훌쩍이고 있었다. 회사 아래에서 홀로 묘목처럼 서 있던 그 남자가.
 
 
 
밖에서 한참이고 나오지 않는 도전무를 기다리던 우진이 안 되겠다 하여 화장실로 들어왔을 땐, 돌아선 경수의 멀끔한 뒷모습과 티셔츠 차림의 달동네 청년이 가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종대는 난데없이 나타난 회사 사람에 냉한 표정을 한 채 손목이 붙들려 있었다. 꽤 센 악력이었다. 전무님...? 우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경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종대의 시선이 잠시 우진에게 붙었다. 그리고 다시 경수를 보았다. 종대는 대표를 불러달라는 제 말에 전무님은 만날 수 없다던 로비의 덩치들에게 들은 말을 기억해냈다.
 
 
 
"전무님? 당신이 대표야?"
"......."
"왜 남의 집을 당신 멋대로 없앤다고 결정하는 거야? 당신이 뭔데. 당신이 그렇게 잘났어?"
“......”
“나는 절대 안 나가.”
 
 
 
종대는 묵묵부답으로 손목을 붙들고 있는 경수의 손을 휙 쳐내고 우진을 스쳐 갔다. 경수를 쏘아보던 눈빛이 차가웠다.
 
 
 
최대한 안 마주치게 잘 돌려보내라고 했더니 보안팀 새끼들은 대체 회사 월급 받고 회사 밥 먹고 보너스 받고 씨발 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진이 딱딱해진 입매를 쓸며 보안팀과 이야기하겠다며 죄송하다고 덧붙였을 때 굳게 닫혀있던 경수의 입이 벌어졌다. 성함이 뭡니까.
 
 
 
"보안팀장 말씀이십니까."
"아니, 저 사람."
"예?"
"이틀 안에 저 사람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봐."
 
 
 
등을 보이고 한참 있다 돌아서는 도경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르게 보였던 세상이었다. 종대가 색을 몰고 사라진 후 다시 모든 것이 물 빠진 흑빛으로 얼룩졌다.
 
 
 
그래서 한창 업무에 집중해야 할 시각 도전무는 뒤통수를 받쳐주는 고급 사무용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 우진이 읊어주는 종대의 사정을 듣고 있는 것이다. 줄줄 들려지는 바로는 꼭대기에 가까운 두 집 중 하나에 사는 종대는 아르바이트를 몇 개나 하면서 여섯 살배기 여동생을 키우고 있었다. 고졸에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매 끼니도 엉망으로 챙기고 있었다. 화장실 안 저를 보고 그냥 지나가려는 종대를 잡았을 때 뼈가 도드라졌던 팔을 기억했다. 예상은 했지만 뭐 하나 좋은 이야기가 없군.
 
 
 
"우진아."
"네, 전무님."
"김종대 씨.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몇 시에 끝난댔지."
 
 
 
경수가 책상 위에 펼쳐놓아져 있던 서류철을 미련 없이 덮었다.
 
 
 
 
 
 
 
 
 
 
 
 
 
높다랗고 좁아 조금만 신경을 놓아도 넘어지기 쉽게 생긴 계단을 오르는 종대의 손은 양쪽 무릎을 짚고 있었다. 종일 서 있어 피곤했던 탓에 층계를 오를 힘이 별로 남지 않았다. 뒤에서는 보리가 잉차잉차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빼고 열심히 뒤따르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업어 달라는 소리 한마디 없이 잘 참고 있었다. 허리가 아려올 즈음 가만 서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려 몸을 똑바로 세운 종대는 문득 집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끔 빚쟁이들이 찾아오곤 했기에 곧바로 경계하고 어두운 가운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낯선 자를 가만 관찰하였다. 담벼락에 기대어 빨간불을 비벼 끄고 있는 몸의 모양새로 남자라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경수를 알아보지 못한 종대는 수상한 느낌에 뒤로 물러서 올라오고 있는 보리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눈을 가늘게 떴다. 위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한참을 기다렸다. 아마 세 시간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꿈적이며 올라오는 종대와 보리를 발견한 경수가 얼른 담배를 껐다. 그들이 아직 멀었음에도 채도가 낮기는 했지만 어른거리는 붉은 빛이 분명히 보였다. 그러면 또 마음 한켠에 회오리가 치고 박동이 미친 듯이 빨라져 낯선 감각에 제가 아닌 것 같아 두려운 감정이 생기게 된다. 열심히 올라오던 그들이 한참을 서 있자 영문을 몰라 발을 아래로 내디뎠다. 보리야. 내려가자. 검은 그림자의 움직임에 종대와 보리가 손을 잡고 뒤로 돌아 발을 움직였다. 때아닌 추격이 이어졌다. 일단 차에서 대기하라는 말에 그러고 있던 우진이 뜀박을 하며 다 올라온 길을 내려가는 셋을 보고 있으니 달밤에 쟤네가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다. 한참 열심히 쫓아가다 원래 체력이라는 게 글러 먹은 경수가 결국 우뚝 섰다.
 
 
 
"김종대 씨!"
 
 
 
그제야 종대가 멈추었다. 긴장감 사이에서 귀를 세웠다. 이런 목소리는 살면서 단 한 번 들어보았다. 가지 마십시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렇게 묻던 건조한 바람 같은 목소리. 뒤로 다급하게 따라붙은 발소리에 종대는 보리를 등 뒤로 숨기고 돌아섰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세팅이 잘 되었던 머리는 헝클어졌고 헉헉대는 들쑥날쑥한 숨소리에다 손날로 땀을 닦던 경수가 그렇게 물었다.
 
 
 
"당신이... 여기는 왜 찾아왔는데요?"
 
 
 
아, 저기.. 그게. 찌푸려진 종대의 표정에 말이 턱 막힌 경수는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 써두었던 말을 몽땅 잊고 입술만 달싹이다 주머니를 뒤져 카드키를 꺼내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이곳과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가구도 반드시 내일까지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가만히 듣고 있던 종대가 그 의도를 알아채고 바로 인상을 팍 구기며 내밀어진 손을 쳐서 밀었다.
 
 
 
"돈 많아서 좋겠네요. 내 주제에 자존심밖에 없어서 미안한데, 다신 여기 찾아오지 마세요. 집 사주면 내가 좋다고 나갈 줄 알았어?"
 
 
 
보리야 가자. 주먹을 꽉 쥐었다 편 종대가 보리의 손을 잡고 집을 향해 다시 계단을 퍽퍽 오른다. 보리가 지나가면서 경수를 빤히 보았다. 경수는 카드키를 쥔 손을 떨구고 멍하게 그렇게 있었다. 개새끼... 지가 뭔데, 지가 뭔데... 땀을 닦는 체를 하며 눈을 훔친 종대가 보리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왜 눈물이 차오르는지 그 영문을 다 알 수 없었다.
 
 
 
 
 
 
 
경수가 한참을 나타나지 않자 결국 차에서 내려 비탈을 내려오던 우진이 돌바닥에 혼자 그냥 가만히 앉아 갖은 청승을 다 떨고 있는 도전무의 옆으로 와 섰다. 대충하고 갑시다. 이 동네는 가로등도 엉망이네요. 저를 틱 보는 경수는 머리를 어찌나 헤집어 놓았는지 전쟁통에 뛰어들어갔다 나온 꼬라지가 따로 없었다. 갑자기 이 근처 괜찮은 집을 알아보라고 시키더니 떡하니 충동적으로 계약을 하질 않나 김종대 씨네 동네로 가자고 하질 않나 이제는 이렇게 앉아서 고독이나 잡수고 있다니. 갑자기 뭔 답지 않은 짓인지. 잠시만... 전무님이 설마,
 
 
 
"김종대 씨한테 첫눈에 반했습니까?!"
 
 
 
우진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전무님 취향이 남자였어요? 그러고 보니 여자들과 밥 먹는 자리 엄청 싫어했잖아요! 괜스레 과장된 반응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시도는 경수의 한숨으로 갈무리 되었다. 진짜 뭔 사단이 나도 난 모양이다. 우진이 그 옆에 나란히 대충 탁 쭈그려 앉았다. 드라이 한 바지가 엉망으로 더럽게 되었다고 잔소리를 할 와이프 생각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쪽 사정이 더 급해 보이니까.
 
 
 
"형, 무슨 일인데 그래요."
"우진아."
"예."
"어제 처음으로 내 손이 어떤 색인지 알았다."
"네?"
 
 
 
그 말에 우진이 벌떡 일어났다. 경수가 대충 만든 허수아비처럼 뒤틀리게 선 우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김종대 씨가 보여주었다. 자동차의 빛, 누군가의 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 가게의 빛, 가로등의 빛. 경수는 촘촘하게 제각각의 빛을 띠고 있는 서울의 아름다운 밤을 세상에서 가장 깜깜한 곳에서 김종대 씨가 보여주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진은 이마를 짚었다. 부모님들의 친분으로 어린 시절부터 형이라 부르며 지냈고 제가 아껴 마다치 않는 경수였다. 저는 평범하게 자라 애까지 있는 가장이 되었지만 경수는 부모님의 회사도 작은아버지에게 거의 빼앗기다시피 되었고, 컬러리스에 사소하게 연락할 친구 한 명이 없었다. 사실 경수는 저와 맞는 비비드를 찾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체념하고 잘살고 있었건만. 이제는 사정이 졸라 더 골치가 아프게 되었으므로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안타까워서. 솔직하게 컬러리스라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김종대 씨가 필요하다고. 우진의 말에 경수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저 알아서 하겠다고만 대답할 뿐이다.
 
 
 
다음 날에도 경수는 그 담벼락에 가만 붙어 있었다. 가로등도 엉망이라는 우진이 어제 지나듯 한 말이 걸려 경수는 시의 허가를 받고 업체를 불러 겨우 발끝만 비추는 동네 가로등을 모조리 갈았다. 허름한 동네에 고급진 엔틱 디자인의 가로등이 상당히 이질적이었지만 이제 김종대 씨의 어린 동생도 밤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 둘을 해치리라는 못된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깍지를 단단히 끼고 담벼락에 기대어 종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멍하게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고 유심히 생각하던 경수는 그냥 웃고 만다. 우연히 떨어진 보물을 찾은 마음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한 번 저를 떠난 편도인 마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제 마음이 쉬운 거였다니. 오늘은 그가 더한 말로 자신을 쫓아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화장실에서 종대를 만난 이후부터 매일 그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종종 찾아뵙던 신경정신과 의사는 노인이 되었다. 안과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진단이 내려진 후, 신체증상장애라 의심해 정신과를 찾았었다. 그러고 보니 컬러리스라는 말도 안 되는 진단을 받은 것도 꽤 오래 되었다. 의사는 경수에게 제 비비드를 만나게 되면 처음 경험하는 감각에 강력하게 빠져들게 될 것이라 했다. 정말로 그러하였다. 의지로 조절이 되지 않는 불가항력이었다. 이렇게도 단단히 빠져서 그 모습이 종일 머리를 맴돌고 있다는 한심한 사실을 당사자인 김종대 씨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살을 스치는 수트에 오소소 소름 같은 것이 올라올 무렵이 되어서야 종대는 돌아왔다. 발자국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도, 아무런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점차 채도를 찾아가는 가로등의 불빛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종대가 어디 즈음에서 이곳을 향해 점점 걸어오고 있는지 확실하게. 경수는 가만 주황으로 짙어지고 있는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러니 또 마음이 멋대로.
 
 
 
 
 
“오빠! 이제 안 어둡다 그치?”
“그러게... 가로등이 다 바뀌었네.”
“누가 그랬지?”
“글쎄...”
“난 알아. 잘생긴 오빠가 그랬어.”
 
 
 
보리가 종대를 보느라 고개를 삐죽 내밀자 종대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유치원 가방을 보리의 손에서 슬쩍 빼 제 어깨로 들쳐 올렸다. 그래. 아마도, 그 사람이 한 거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그는 곧 이 동네를 밀어 버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을 지을 사람인데 말이다. 저에게 잘 보여서 도장을 찍게 하려는 심산임에는 분명한데 왜 이렇게까지 낭비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종대가 심란한 표정을 짓든 말든 보리는 신이 나서 이제 안 넘어지고 잘 올라갈 수 있다며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토끼처럼 깡총거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어제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다. 잘 세팅된 머리를 하고, 가격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옷을 입은 그 사람은 제가 죽어도 타볼 수 없는 좋은 차를 타고 왔을 것이다.
 
 
 
“오빠!”
 
 
 
보리가 뒤뚱거리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경수는 혹여 보리가 다칠까 뛰지 말라 하였다. 응응! 샛노란 옷을 입고 아는 체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경수가 안아 올리기도 전에 보리는 경수의 다리를 붙잡아 매달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부끄럼을 탄다. 종대는 유치원 가방을 다시 어깨로 고정시키며 잠시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보리는 낯가림이 없는 어마어마한 얼빠였다. 잘생긴 오빠라 지칭했을 때 눈치를 채고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어정쩡하게 올라가던 종대가 보리를 부른다.
 
 
 
“보리야. 집에 가 있어.”
“왜애... 나는 오빠랑 놀고 싶어.”
“보리야. 우리랑 놀러 온 사람 아니야. 먼저 들어가 있어.”
 
 
 
오만 싫은 기색을 보이면서 보리가 집으로 들어가고 종대는 두 칸 아래 서서 경수를 불렀다.
 
 
 
“대체 무슨 꿍꿍이에요. 저는 여기 못 떠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저는 그냥.”
“그리고 제가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한 거로 기억하는데요.”
 
“김종대 씨.”
“네. 말씀하세요.”
 
 
 
“...눈이 예쁘십니다.”
 
 
 
이... 또라이. 종대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진짜 미친놈인가. 종대는 질색하였지만 경수는 진심이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독기 서린 눈동자가 빛을 받아 울멍지고 있었다. 그 속에 멍한 눈코입을 한 제가 비친다. 종대는 팔딱대며 살아 있었다.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했다. 낡은 운동화로 이런 험하고 많은 계단을 매일 오르며 살고 있었다.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밖에서는 많은 것들을 참으면서 저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있다. 예뻤다. 눈을 뾰족하게 세우며 예민하게 저를 경계하면서도 찰나에 스치는 호기심 같은 것들이. 비치는 모든 것을 깊이 담아내는 우물 같다. 그 안에는 하늘에 있는 것들이 모두 담겨있다.
 
 
 
제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은 표정에 아예 질려버린 종대가 다시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신고를 하겠다며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사실은 제가 신고를 한다고 해서 경찰이 와서 저 남자를 데리고 가준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난한 제 말을 들어주기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종대의 등 뒤로 경수의 음성이 들린다.
 
 
 
“제 이름은 도경수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꼿꼿하게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다. 또 그에게는 교양 있는 말투와 섬세한 생김새와 돈 많은 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련됨이 있다. 가난한 저에게는 아무것도 해당되지 아니하는 요소들. 종대는 저를 더 힘들어지게 만드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는 체를 하며 문을 쾅 닫았지만 어느새 따라 들어온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대문 너머의 종대를 돌려세웠다. 저녁 거르지 마십시오. 종대는 보리가 나와 가방을 툭툭 잡아당기기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저녁을 거르지 말라고 말해준 적이 없어서, 이러한 마음이 드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무님?”
“아, 어... 뭐라고 했지.”
“저... 지금 회의 중이시고, 방금 최부장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진이 손날을 세워 경수의 귀에 대로 조용히 속삭였다. 당장 정신 안 차리면 오늘 김종대 씨가 점심으로 무엇을 드셨는지 절대 안 가르쳐 줄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러자 도전무는 맥아리 없이 등을 의자 시트에 푹 파묻고 잘난 손으로 만년필이나 쳐 돌리고 있던 손을 딱 멈추고 꼿꼿이 허리를 세운다. 언제나 짓던 세상 멸망하면 다 죽으면 된다는 염세적인 표정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도 나는 살아남으리라는 벼려진 눈빛을 한 긴장감 있는 표정으로 딱 세팅이 된다. 진작 좀 이러지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바늘 같은 질문들이 최부장을 쑤셔대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신합니까? 뭘 보고 확신합니까. 시작부터 이따위인데. 미간을 찌푸리며 되도 않는 겁을 주는 것을 보아하니 영 갖고 온 자료부터 틀려먹어 일찍 끝내고 싶어 쇼를 하는 것일 테다. 순식간에 설렁설렁 넘어가던 회의장이 공포 정치의 현장으로 바뀌어 다들 허리를 바짝 세우고 머리를 쥐어짜 대답을 만들어 내느라 안달이 났지만 몇 마디 더 듣지 않고 경수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회의를 엎었다.
 
 
 
“살살 좀 하지 그랬습니까.”
“당장 정신 차리라며.”
“오늘도 안 가보셔도 되겠어요? 저는 전무님 상사병에 걸려서 죽을까 봐 걱정되는데요.”
“그래서.”
“네?”
“그래서 김종대 씨가 점심으로 뭘 먹었냐고.”
 
 
 
후. 삼각 김밥을 드셨습니다. 됐어요? 우진의 말을 듣고 보니 20분 후면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종대가 또 이상하게 끼니를 때우고 있다. 그러니까 말라비틀어짐의 연속이다. 휴... 도경수의 엄지가 바쁘게 일했다. 어플을 켜고 탁탁거리며 검색을 한다. ‘초밥 맛집’. 그 잘난 정수리를 보던 우진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뱉었다. 이분 때문에 수명이 반으로 줄었다, 이미.
 
 
 
열흘째 그 골목을 오르는 건 우진 뿐이었다. 제가 가면 싫어한다며 경수는 매일 손에 무언가를 들려 우진을 보냈다. 그분은 저도 싫어하는데요, 라고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래놓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만들었다. 종대가 알면 그 집착의 정도에 질색을 하고 다시는 도전무를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집 앞에서 기다리다 이거 못 드리면 퇴근을 못 한다는 불쌍한 체를 가미한 제 거짓부렁에 종대는 대문을 닫았다가도 10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나오는 마음이 무척 약한 사람이었다. 요즘 경수의 낙은 그 남매가 뭘 먹고 몇 시에 들어왔으며 뭔 옷을 입고 다니는지를 듣는 그런 사소한 것에 있었다.
 
 
 
“보리양이 개와 고양이를 영어로 읽을 줄 압니다.”
“똑똑하군.”
“하지만 기린을 앨리펀트라고 읽고요.”
 
 
 
그건 귀엽고. 쓰고 있던 안경을 책상 유리에 엎어 놓은 경수는 눈을 꾹꾹 누르며 덧붙였다. 최근 들어 얼마간 달고 살던 불면증이 도져 수면 패턴이 상당히 불균형해 피로가 급속도로 쌓이고 있었다. 우진이 불퉁하게 도경수에게는 오빠, 저에게는 아저씨라 부른다는 말을 해주니 무릎을 검지로 툭툭 치며 진지하게 듣던 경수의 얼굴에 한적한 숲 같은 조용한 웃음이 걸리고야 만다.
 
 
 
잠든 보리를 업고 올라오던 종대가 오늘도 여전히 위에서 양손에 가득 뭔가를 들고 있는 우진을 보고 한숨을 푹 쉰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은 도경수 씨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는데 열흘째 꼬박 자기는 뭐한다고 바빠 죽었는지 살았는지, 직원을 통해 부담스러운 음식이나 과일 등을 들려 보내거나 하고 있었다. 몇 번은 보란 듯이 내다 버렸는데, 이게 뭐라고 짜증 나게 또 마음에 걸려 오래 그러지 못했다. 덕분에 호강하는 건 보리였다. 여섯 살이지만 제대로 잘 먹고 잘 자지 못해서 또래보다 현저하게 작아 밖에 나가면 네 살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 보리의 혈색이 제법 좋아졌다. 밤에도 깊이 잠들지 못해 뒤척이다 새벽이 되면 지쳐 늘어진 저보다도 일찍 일어나서 혼자 세수를 하고 유치원복을 입던 보리는 이제 계단을 오르느라 불편하게 들썩대고 있을 등에서도 픽 잠이 든다. 덩치가 제법 되는 우진이 손에 든 것을 놓고 보리를 받아 든다고 내려가니 됐다고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넘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고양이처럼 눈을 삐죽 세우더니 열흘간 전무님이 아주 헛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는 생각이 든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막는다고 입술을 퍽 깨물었더니 얼얼하게 아팠다.
 
 
 
“도경수 씨는 원래 이렇게 직원을 막 부려먹나 봐요. 아님 바빠 죽었든지.”
“전무님이요?”
“본인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매번 비서님만 보내잖아요.”
 
 
 
그러면서 대문을 퍽 밀어젖히고 들어가는 것이다. 보리를 안고 멍하게 있던 우진은 안 들어오고 뭐 하냐는 종대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봉지를 갈무리하며 헐레벌떡 대문에 발을 들인다. 이번에는 도저히 참아지지 않아 이가 다 드러나게 웃으면서.
 
 
 
 
 
 
 
 
 
 
경수가 온 줄도 모르고 고장 난 세탁기로 와이프와 입씨름을 벌이던 우진이 데스크를 두드리는 소리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회의가 끝나고 파김치의 모습을 한 경수는 정말 상사병에라도 걸린 듯 부쩍 살이 내려 있었다. 열흘 전 기적은 꿈인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무성영화에서 그렇듯 흑백의 시야로 직원들이 인사를 했다. 다들 회사의 높으신 분을 보고 한껏 웃고 있었지만, 생기가 없었다. 장인이 잘 만든 인형 같은 사람들. 일상이 그러하듯 데려다주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길게 누웠다. 넘어가는 시침만 가만 보던 경수는 종대가 늦을 것 같다는 우진의 호출에 망설임 없이 소파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들었다. 전무님, 보리양이 혼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기사를 부르면 늦을 것 같아 택시를 잡아탔다. 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네온사인이 그를 백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트에 기댄 경수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택시에서 내린 경수는 불 꺼진 놀이터 앞에서 혼자 놀고 있던 보리를 발견했다.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저를 알아보고 바로 경수를 향해 도도 달려왔다.
 
 
 
“어? 오빠! 오빠!”
“보리야.”
“응! 오빠가 우리 유치원에는 무슨 일이야?”
 
 
 
보리는 무릎을 굽히고 제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경수의 팔을 잡고 한껏 늘어졌다.
 
 
 
“종대 오빠가,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네. 어떡하지.”
“음...”
“우리 둘이서 먼저 같이 놀고 있을까.”
 
 
 
응응, 나는 좋~아! 골똘하게 고민을 하던 보리의 모래 묻은 통통한 손이 경수의 손가락을 잡아 이끌었다. 보리가 엉망진창, 그냥 되는 대로 만들고 공주님 성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붙일 때, 그 옆에서 도경수는 비싼 수트를 입고 퍼질러 앉아 가만히 보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간 그러다 머리에 달린 리본 꽁지가 분홍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몸을 곧추세우고 모래 묻은 옷을 툭툭 털었다. 굉장히 오랜만인 김종대 씨가 오고 있었다.
 
 
 
종대가 일을 마치고 급하게 유치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유치원이 마치고 한 시간이 넘어간 시각이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머리가 터지도록 뛰었는데 도착했을 때 보리는 열흘 만에 보는 다른 오빠와 모래 놀이를 하느라 김종대 오빠는 완전 뒷전이었다. 왕서운하지만, 혼자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힘이 풀어진 종대가 뻘밭에서 뒹굴어놓고도 멀끔하게 잘난 모습의 경수를 한 번 틱 보고는 뛰느라 뒤집어진 제 연분홍 셔츠를 바로 하고 엉망일 머리를 죽죽 잡아당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제대로 입고 나올걸.
 
 
 
“흐흠, 야 김보리!”
“어? 오빠!”
“뭐 하고 있었어.”
“나 잘생긴 오빠랑 모래 놀이 하고 있었어. 오빠도 할래?”
 
 
 
보리의 손을 털어주던 종대가 힐끗 경수를 보았다. 경수는 보리의 유치원 가방을 양손에 쥐고 어정쩡하게 모래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멀쩡하게 생겨서 하는 거 보면 또 웃기지도 않다. 경수는 오랜만에 본 종대가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또 말을 걸고 싶기도 하였지만 싫은 기색을 할까 멀찍이서 다가가지 못하였다.
 
 
 
“뭐, 계속 거기 있을 거예요?”
 
 
 
왜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말이 나가지 않을까. 사실은, 고맙다고 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법 상한 얼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고 물어보려 하였는데 정작 나오는 제 말은 뾰족해 종대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인상을 팍 쓰며 입술을 감쳐물고 돌아서는 종대를 보던 경수가 한쪽 어깨에 보리의 가방을 멘다. 정장 차림에 분홍색 물고기 가방이 상당히 어색했다. 보폭을 두고 둘의 뒤를 따른다. 상점의 불빛들이 그들을 비출 때면 걸음 탓에 나란히 하늘거리는 분홍색 셔츠와 분홍색 머리끈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경수는 괜히 웃음이 나고, 마음 어딘가가 아슴아슴 아파온다. 따뜻해 보여서. 제 시야로 터지듯 쏟아지는, 거리의 화려한 색들 사이 소소하게 핀 들꽃 같아 보여서, 예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저 둘을 지켜주고 싶어서.
 
 
 
 
 
동네가 시작되는 초입에서 몇 번이나 이제 돌아가 보라고 하였지만 말을 듣지 않고 끝내 달동네 꼭대기까지 따라온 경수였다. 적막이 퍼져있는 골목을 지나 보리를 집으로 먼저 들여보낸 종대가 경수의 앞에 섰다. 걸어오는 내내 뒤를 신경 쓰며 생각이 많았던 종대는 막상 경수를 마주하니 이제는 고맙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고민하던 이야기도 말이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김종대 씨, 많이 피로해 보이십니다.”
“그건 그쪽도 만만치 않은데요.”
“아, 일이 좀 있어서.”
“보내주신 저녁도 잘 먹었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아닙니다.”
“도경수 씨... 실은 부탁이 하나 있어요.”
 
 
 
조금 전만 해도 계단을 따라 오르는 저에게 그냥 가달라고 미운 소리를 하던 종대가 잔잔한 표정으로 부탁이라니. 도경수 씨라고 제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였다. 한 번만 지나가듯 말한 것임에도 기억해주고 있었다. 특이하게 말려 올라간 입매가 몇 번 꾹 닫혔다 열린다. 어딘지 슬퍼 보이는 표정에 뭐든 다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 부탁은, 도경수 씨가 우리 남매를 내버려 두셨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분도 보내지 말아 주세요. 차라리 우리를 처음부터 쫓아내려 했다면 도경수 씨를 미워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당신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더라도 미워하기가 힘들어지려 합니다. 당신을 믿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부탁드립니다.”
 
 
 
 
 
 
어떠한 아픈 부탁이라도 뭐든 다.
 
 
 
 
 
 
 
 
 
 
아르바이트 도중 몇 번이나 멍하게 있다 지적을 받았다. 이미 손에 익은 일임에도 답지 않은 실수까지 했다. 그에게 점점 마음이 기운 이후로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위해 경수에게 다시는 엮이지 말자고 이야기했지만 편해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불편해졌다.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처음으로 저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경수에게 마음을 열기가 두려워 다시는 오지 말아 달라 그렇게 말했던 밤, 저를 한참이나 가만히 보던 경수는 그저 감기 조심하라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내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이제 경수는 정말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우진도 소식이 없었다. 제가 먼저 끊은 사람이니 할 말은 없었지만 경수의 마지막 표정이 계속 맴돌았다. 앞서 올라가는 보리도 기운이 없어 보이니 종대는 괜히 심란했다. 처음만 그렇게 미웠지 그 후론 꼭 그렇지만도 않았는데. 너무 매몰차게 이야기했나. 종대는 매일 집이 가까워 오면 골목을 살피거나 그의 차가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이 뭐라고 이렇게 오르다 보면 이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경수 씨가 서 있을 것 같다.
 
 
 
정작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건 난데.
 
 
 
한숨을 푹 쉬고 머리를 헝클이며 집을 향해 올라가던 종대는 거짓말 같은 경수를 보고 눈을 자꾸만 감았다 떴다. 폐허 같은 동네에서 오래 살아오면서 보리도 알고 있는 사실. 유령은 없다. 그리고 이 훤한 가로등 아래에서는 그를 강도나 다른 나쁜 사람과 착각할 수도 없다. 그러면 진짜 그가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도경수 씨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답지 않게 비틀거리며 담벼락에 기대어 몸을 가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리가 잘생긴 오빠가 왔다고 그에게 매달리는 동안 종대는 가만 서서 피곤한 기색으로 보리를 안고 등을 토닥거리는 경수를 본다.
 
 
 
"아이, 술 냄새~!"
 
 
 
그리고 곧 보리가 코를 틀어쥐며 떨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경수는 거의 넘어지려 하고 있었다. 둘 다 바닥에 곤두박질이라도 칠 분위기라 뛰어가 경수를 받쳐 들고 세웠다. 느릿하게 눈꺼풀이 들린다. 경수를 세우는 종대의 팔 위로 그의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휘청대며 벽에 눕다시피 기댄 경수가 눈을 내려 어색하게 팔을 문지르고 있는 종대를 보았다. 이 얼굴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며칠간은 미친 듯이 일만 했다. 효과가 보이는 듯 했지만 금방 다시 힘들어졌다. 또 며칠간은 정수리까지 취해 소파, 바닥을 가리지 않고 잠에 빠졌고, 먹지도 않고, 이틀을 결근했다. 결국 작은아버지까지 찾아와 열 받은 표정으로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정신을 어디에 팔고 돌아다니는지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진짜 못 해먹겠다고 생각했을 땐 종대의 집으로 가는 비뚜름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눈치가 백 단인 보리는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하품을 찍 하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골목엔 가로등 하나와 둘만이 남았다.
 
 
 
“...김종대 씨.”
“술을 왜 이렇게 마셨어요.”
“잘 지내셨습니까.”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면서 말은 잘만 했다. 어디 안 좋은 곳은 없으십니까... 경수가 말꼬리를 흐리며 다리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였다. 종대는 늘 모자랄 것 없이 보이던 경수가 흐트러져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이상하고 가슴의 가운데에서 자신도 모르는 무엇이 터져서 울컹울컹 솟아오르는 것이다. 아무런 대답도 물음도 하지 못하고 손톱 끝만 만지작댔다. 그렇게 잘만 따졌던 제가 어디 가고 꿀 먹은 벙어리만 남아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저는 잘 지냈습니다.”
 
 
 
저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봐도 큰일 말아먹은 사람의 모습임에도 자신을 잘 지냈다고 계속해서 읊조리는 도경수가 미웠다. 불쌍했다. 저를 싫어하지 마십시오. 오지 말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루에 한 번이면 됩니다. 일 분이어도 좋습니다. 눈을 덮을 만큼 긴 종대의 앞머리 너머로, 뚫어져라 저를 보고 있는 경수가 아른거렸다. 차분하게 정수리로 쏟아진 말들 때문에 종대는 그를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운동화 끝을 바닥에 직직 긋는다. 그것을 부정적인 단서로 보았는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경수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비틀비틀 계단을 향해 걸으려 했다. 근데, 제대로 걷지를 못하였다. 한꺼번에 저렇게 많은 말로 사람을 뒤흔들어놓고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걸음으로 비척비척 내려가려고 수를 쓰는 것을 보던 종대가 경수를 붙들었다. 그리고 경수의 팔을 들어 부축했다. 그는 방금까지 어떻게 서 있었는지 그냥 축 늘어지고 만다. 다시금 허리를 숙여 경수를 어깨에 받쳐 들고 대문으로 들어선다. 대문 열리는 소리에 거실에서 뽀로로 책을 넘기던 보리가 후다닥 일어났다.
 
 
 
“어? 잘생긴 오빠 자구 가?”
“응. 자고 갈 거야. 보리야. 얼른 가서 방문 열어.”
“우와! 응! 보리랑 같이 잘래!”
“안 돼, 보리는 오빠랑 자야지. 저기 베개 하나 줄래?”
“응. 근데 오빠!”
“왜?”
“오빠는 얼굴이 왜 빨개?!”
“히, 힘들어서 그래. 힘들어서... 어휴. 무겁다... 보리야. 잠시만 나가 있어. 좀 눕혀야 해서...”
 
 
 
손등으로 달아오른 뺨을 꾹꾹 누른 종대가 이불 하나 깔려있는 방에 경수를 대충 눕혔다. 아까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저를 싫어하지 마십시오. 오지 말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루에 한 번이면 됩니다. 일 분이어도 좋습니다. 고요하게 잠이 든 잘난 얼굴을 보며 그 말을 가만 기억하던 종대는 갑작스레 경수가 모로 눕는 것을 보고 그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달아오른 귀가 뜨거웠다. 그리고, 오늘 밤은 쉽게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종대가 씻으러 간 사이 현관을 따라 방까지 죽 이어지며 떨어져 있는 경수의 만년필, 시계 같은 짐들 중 휴대폰이 울렸다. 우진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보리가 진동하고 있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꼼질댄다. 아저씨!
 
 
 
여보세요? ...보리양? 퍽 의아해하는 듯한 우진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들려왔다.
 
 
 
자지 않으려는 보리를 달래 겨우 재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을 땐 헥헥거리며 도경수보다 더 지쳐 보이는 우진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당장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자게 두세요. 술을 엄청 드셨던데... 잠시 앉아요. 물 한 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저...”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잠든 보리의 앞머리를 슬쩍 쓸어준 우진이 무릎을 껴안고 가만 앉아 있는 종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
 
 
 
 
 
 
 
 
 
눈이 팍 뜨였다. 가장 먼저 본 것은 창 너머로 들어온 빛과 둥둥 떠다니는 먼지와 같은 부유물들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다. 꿈을 꾸고 있는지 정말로 눈을 떴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꿈이라고 하기엔 생생했고, 현실이라고 하기엔 행거에 걸린 옷, 체취, 이불 냄새가 낯설었다. 머리가 왕왕 울려 잠시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빛을 가리고 무슨 상황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던 경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훑었다. 다시 보니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다. 행거에 걸린 옷은 본 적이 있었다. 낡은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경수에게도 익숙한 중학교 교과서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색이 바랜 벽지 위에 걸린 종대의 유치원 졸업사진이 무척이나 귀여웠고, 10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다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오전 10시 반에 김종대 씨의 집에 있을까.
 
 
 
방 안에서 경수가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사이 종대는 보리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콩나물국을 데우고 있었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에 경수가 문을 조금 열어 틈 사이로 상을 차리는 종대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눈을 떴을 때 이런 풍경을 보는 것이었다. 흑백으로 얼룩진 아침이 아니라 눈을 돌리는 곳마다 빛을 받아 가만히 누워 뜯어보고 싶은 아침 말이다. 청소년기에는 그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아침 풍경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을 몸소 확인한 지금은 너무도 질투가 났다. 다들 아침마다 이것을 당연하게 보다니, 그리고 나는 당연하게 보지 못하다니. 흰 셔츠에 부슬부슬한 갈색 머리를 한 종대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른 날개뼈가 셔츠 위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상을 들려고 몸을 굽히는 것을 본 경수가 방문을 열고 얼른 상을 받아 들었다.
 
 
 
“제가 합니다.”
“어, 언제 일어나셨어요?”
“아까 전에요. 그런데,”
 
 
 
왜 제가 김종대 씨 집에 있는 것일까요. 바보 같은 질문은 종대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어제 했던 주정과 속에서 계속 맴돌던 답답한 말들을 쏟아 내었던 모든 장면들이 기억났다. 경수는 밖으로 뛰쳐나갈까 극심한 고민에 사로잡힌다. 그냥 반질반질하게 애같이 귀여운 김종대 씨고 뭐고 이 모든 것이 아까 날리던 먼지의 입자 크기로 부서져 사라질 때까지 집에 틀어박혀 머리나 쥐어뜯고 싶어지고 만다.
 
 
 
“속 안 아파요? 어서 먹어요.”
“아, 예...”
 
 
 
제 마음의 동요는 이다지도 큰데 반대로 거실 바닥에 자리를 잡고 숟가락을 챙기고 있는 종대는 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지. 제가 사고 치듯 전한 진심도 어쩌면 김종대 씨에게는 연연하지 않을 정도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경수는 그만 맥이 탁 빠진다. 자리를 잡고 가만히 앉았다.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날까 고개를 숙여 숟가락을 쥐고 국을 떴다. 따뜻하고, 칼칼한 국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지난밤 토하듯 올라온 감정들을 눌러주었다.
 
 
 
“맛있네요.”
“도경수 씨.”
“네.”
“저 좋아해요?”
 
 
 
놀라 고개를 쳐든 저와 달리 무슨 심산인지 종대는 아예 턱을 괴고 경수는 눈을 빤히 보고 웃고 있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눈이 접혔고, 붉은 입술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한 번 보니 계속 보고 싶어져 한참이고 여기저기를 뜯어 보다 곧 드러나는 어딘가 능청스러운 표정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숟가락만 돌리고 있으려니 속에서는 또 제가 어쩌지 못하는 쿵쿵거리는 박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얼마간 망설였다. 네. 좋아합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경수가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짧게 대답하자 종대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러온다.
 
 
 
“도경수 씨.”
“...네.”
“내일도 나 만나러 와 줄래요?”
 
 
 
터무니없이 작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이제는 아예 숟가락을 놓은 경수가 상 아래로 제 손을 마주 꽉 깍지를 껴 잡았다. 아, 바보 같아 보일 것이 분명함에도 경수는, 종대처럼 눈을 접고 입매를 올려 그렇게 웃었다.
 
 
 
“네. 좋습니다.”
 
 
 
국이 다 식어 다시 데워야 할 때까지 말이다.
 
 
 
 
 
 
 
 
 
며칠 사이의 엉망이 된 모습과 또 한 번의 무단결근으로 회사 전체가 경수의 사생활에 관한 갖은 루머에 시끄러웠던 것도 잠시, 다음 날 멀쩡한 얼굴로 출근한 경수는 다시금 냉철한 도전무가 되어 모든 소문을 일축했다. 전날 종대를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종대와 붙어 있는 시간이 길면 떨어져 있어도 몇 시간 색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경수는 집으로 향하다 발을 돌려 이전엔 아무런 감흥 없었던 근처 공원에 가만히 앉아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나 비둘기를 쫓아다니는 어린 애들, 녹음으로 무성해 마지않는 풍경 등을 감상했다. 
 
 
 
“같이 살면, 좋을 것 같은데.”
 
 
 
일을 하다 말고 경수는 이전에 휴대폰으로 몰래 찍어둔 분홍색의 남매가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뒷모습을 본다. 지금은 흑백이지만 김종대 씨를 만나면 다르게 보일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답지 않은 부끄러운 말이 잘도 나온다. 전무님, 살림은 나중에 알아서 차리시고 밀린 일이나 하세요. 댁 상사병으로 엉망 된 회사 일 말입니다. 경수가 다 놓고 사는 동안 수습하느라 골이 빠개질 지경까지 갔던 우진이 혀를 끌끌 차며 맛이 간 도전무를 툭 치면 민망한 건 아는지 폰을 내려놓고 괜히 서류철을 뒤적거리며 워커 홀릭인 척, 이제는 웃기지도 않다. 경수를 데리러 가겠다고 종대의 집으로 찾아갔던 밤, 우진은 종대에게 경수가 컬러리스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더 오래 숨기기엔 도전무는, 너무도 오랜 시간을 캄캄하게 살아왔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하던 전무님이 당신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질문에 종대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도경수 씨는 제가 필요해서 이렇게 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전무님은 김종대 씨 마음을 더 필요로 하는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만, 제가 전무님은 아니니까요. 심심하면 물어나 봐 주십시오. 뭔 생각인지 저도 모르겠으니.’
 
 
 
구겨진 바지를 훌훌 털고 일어나 나서는 우진을 보며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종대의 귀가 붉었던 것으로 보아 예상은 했다만 뭐가 잘 되긴 했나 보다. 서류철을 넘기다 말고 경수가 우뚝 멈춘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우진아."
"네."
"저녁으로 뭘 사서 가면 좋을까."
 
 
 
아아. 처음 하는 연애질에 도전무 바보 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전무님.”
“왜.”
“내일 토요일인데, 어디 가십니까.”
“가긴 어딜 가.”
 
 
 
“설마 데이트 신청 안 하셨어요?!”
 
 
 
요 며칠 우진의 코치로 점수를 잘 따다가도 이렇게 목 막히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는 도무지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우진의 속이 답답함으로 끓어 넘친다. 전무님 조만간 뻥 차일 듯 하네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에 경수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진다.
 
 
 
우진이 결혼하기 전 많이 갔던 장소 중 하나를 추천받아 급하게 기차를 예약했다. 잠에 빠진 종대의 무릎에 경수의 재킷이 덮였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으로 난데없이 집으로 배달된 세탁기에 당황한 우진의 메시지가 윙윙 연달아 날아오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경수와 종대 그리고 보리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주말에 나와 보지 않아 몇몇 비슷하게 자리를 깔고 앉은 가족 단위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셋 모두 무척이나 어색했다. 종대는 가만히 앉아 보리의 옷에 묻은 샌드위치를 물티슈로 닦아주는 경수를 관찰했다. 조심조심. 섬세한 손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내심 웃기다. 내놓는 물건마다 기사로 나오는 회사의 전무로 있는 도경수는 그런 건 다 내 이야기 아니라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다 됐다. 경수가 손을 놓자 보리는 뛰어나가 모르는 애들과 뒤섞여서 말을 나누기 시작한다. 보리가 노는 것을 한참 보던 종대가 경수의 곁으로 가까이 가 앉았다.
 
 
 
“도경수 씨.”
“네.”
“오늘 고마워요.”
“아닙니다. 급하게 나온 게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아니요, 정말 좋아요. 종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옛날에 엄마가 그런 말을 했어요. 돈 많이 벌어서 올 테니까 기다리라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요.”
“......”
“그 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엄마가 돌아올까 봐. 근데 올 사람이었으면 벌써 왔을 거예요. 바보 같이 오래도 기다렸네요. 많이 생각해봤는데, 이제 안 기다리려고요. 이제 저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종대가 메고 온 백팩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두 달 전 경수의 회사로부터 받은 계약서였다.
 
 
 
 
 
 
 
 
 
 
 
 
 
막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조끼를 걸어두고 나오던 종대는 편의점 창을 들여다보고 있는 경수를 발견했다. 어디서부터 그렇게 걸어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목에는 유치원 가방을 걸고 보리를 업은 채다. 아, 보리 저 기집애. 또 업어달라고 보챘구나. 옷차림 때문에 경수는 영락없이 퇴근하고 딸 데리고 나오는 애 아빠 같다. 그게 웃기면서도 민망스러워 종대가 이마를 짚으며 후다닥 나갔다.
 
 
 
"갈까요."
"아, 도경수 씨. 보리 주세요. 제가 업을게요."
 
 
 
경수가 보리를 다시 고쳐 업으며 웃었다.
 
 
 
"천사라서 하나도 무겁지 않습니다. 갑시다."
 
 
 
풉.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도경수 씨가 진지하게 저런 농담 같은 말씀을...! 우진에게 일러주고 싶은 마음이 턱까지 차올랐다. 대놓고 웃는 게 미안해 종대는 고개를 숙이고 만다. 둘은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누가 보면 모르는 사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거리감임에도 어색하지는 않았다.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다 된 삼각 김밥이나 간식을 챙긴 봉지만 덜렁 들고 가려니 괜히 신경이 쓰였지만 경수는 끝내 보리를 내주지 않았다. 사실은, 꽤 오래 아이를 업고 걸어온 터라 경수의 걸음 속도가 늦추어지자 조금 뒤에 걷던 종대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경수가 뒤로 물러오자 종대가 슬며시 말을 건다.
 
 
 
"음... 저녁은 드셨나요."
"아직입니다. 종대 씨는 그거 드셨습니까."
"그거요?"
"세모... 김밥. 그거 말입니다."
"아... 삼각 김밥이요."
"그거, 맛있습니까."
 
 
 
뭐 나름 먹을 만해요. 어깨를 으쓱이던 종대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한 번도 안 드셔 보셨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샀다. 서민 체험이 컨셉도 아니고 좁은 상에 떡볶이와 순대 튀김, 삼각 김밥을 올려놓고 양반다리로 나란히 앉았다.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이게 뭐라고 종대는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뭐 그런 표정까지, 하며 픽 웃던 경수는 신세계를 만났다.
 
 
 
"맛있어요?"
"이거는 이름이 뭡니까."
"순대요! 근데 정말 이걸 한 번도 안 드셔 보셨어요?"
"네."
"보통은 친구들이랑 학교 마치고 오면서 한 번은 먹어봤을 텐데. 정말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나 보네요."
"그렇다기보다... 친구가 없었습니다."
 
 
 
경수가 컬러리스인 것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이상한 녀석이라 불렀고, 같이 놀기를 몹시도 꺼렸다. 늘 혼자 밥을 먹었고, 혼자 놀았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더욱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외로웠지만 곧 익숙해졌다. 그래서 더 외로웠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러하듯 말이다.
 
 
 
"도경수 씨랑 저랑 똑같네요. 저도 친구 없어요. 애들 부모님들이 저를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러게요. 똑같네요."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도 피하지 않았다. 아무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무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동네의 끝자락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회사 로비에서는 바보 같은 표정 짓지 말아 주세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지."
"헤벌레, 표정이요."
 
 
 
놀리는 끼가 다분한 우진의 과장된 표정을 무시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얼른 뒤따라 닫음 버튼을 누르고 팔꿈치로 경수가 휘청거릴 정도로 푹 찌른 우진이 요즘 정말로 얼굴이 좋아진 경수를 빤히 들여다본다. 며칠 전에는 칼퇴를 위해 점심시간을 반납하며 일을 하는 경수로부터 호출이 왔었다. 삼각 김밥 좀 사다 줄 수 있을까. 제대로 뜯지도 못하면서 조용하게 잘 먹는 것을 보며 어찌나 웃어제꼈는지 말도 다 못 했다.
 
 
 
"요즘 재미 좋으신가 보죠."
"뭐가."
"어제는 뭐 과외까지 했다면서요. 뭐라더라... 색칠 과외? 운전은 배울 만 합니까? 한 수 가르쳐 드릴까요?"
"우진아."
"네."
 
 
 
"관심 꺼."
 
 
 
엘리베이터에서 내내 제 시선을 피하기 위해 뒤적거리던 외국 저널을 저에게 툭 안겨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간다. 어휴, 귀여운 놈. 확실히 요즘의 경수는 예전의 그와 같지 않다.
 
 
 
 
 
 
 
 
 
 
도전무가 면허를 땄다. 평생 운전은 못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종대를 통해 감각할 수 있게 되었기에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번 기차로 먼 곳까지 오며가며 불편감을 느낀 이후로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종대가 호기심에 몇 번이나 동승하려 했지만 단호하게 안 된다며 딱 잘라 말하더니 오늘에야 우진으로부터 생김새가 도드라져 증명사진이 눈에 띄는 면허증 사진이 날아왔다. 경수는 빌딩 건축 건으로 인해 업무에 치여 바빴고, 집을 알아보고 있는 종대도 사정이 비슷해 늘 까끌한 얼굴로 만나야 했다. 경수의 일은 이번 주면 마무리가 될 터였고,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무리해서 운전하지 않기로 몇 번이고 약속을 받아내고 우진은 경수를 놓아주었다. 뭘 그렇게 믿었는지 먼저 올라타 있던 종대가 멋쩍을 정도로 안전 운전을 강조하던 우진은 불안했는지 결국 잘 빠진 아우디 뒷유리에 흉물스러운 디자인의 초보 운전 스티커를 붙이고야 돌아섰다. 우진이 보리를 데리고 먼저 떠나고 경수는 운전석에 앉았다.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옆에 태운 사람이 종대인 탓인지 긴장이 되었다. 짐짓 의연한 체를 하는 경수를 보고 종대는 슬쩍 벨트를 잡았다.
 
 
 
"우리 근데, 어디 가요?"
"고아원 갑니다."
 
 
 
의문으로 가득한 얼굴을 보다 조용히 웃은 경수는 시선을 떼고 시동을 걸었다. 작게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다른 계절에 밀려 떠나가는 막바지 여름 바람이 경수와 종대의 머리를 헝클었다.
 
 
 
"..종대 씨, 김종대 씨."
 
 
 
깜빡 잠이 든 종대가 귀에 가까이 들리는 경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아원을 간다더니 도심 같지 않은 풍경에 의아했다. '나무 고아원' 앞장서는 경수를 따라가며 본 표지판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은 식재 되었다 버려진 나무들을 기증받아 관리해 다른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곳입니다. 복잡할 때 종종 왔었는데, 오랜만에 오네요."
 
 
 
사실 멋들어진 곳은 아니었다. 10분 만에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으며 좋은 공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죽은 나무는 그다지 근사하지 않았고, 사람도 편의 시설도 없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근사한 나무들이 심겨져 있는지 편의 시설이 어떠한지 어차피 그런 건 아무 소용 없었다. 버려진 것들이 모인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곳이 좋았다. 우거진 녹음은 느낄 수 없었지만 힘들 때 찾아오곤 했다. 이젠 푸른 잎사귀들을 볼 수 있게 된 탓에 보이는 풍경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앞장서 가는 종대를 따라 한적한 길을 걸으며 경수는 바지의 시접선을 쥐었다 놓았다. 할 말이 있는 탓이었다.
 
 
 
"...전혀 버려진 나무 같지 않아요."
"색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이곳이 황량해 보였는데 지금은 아늑해 보이는군요."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어요. 아까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저는 좋은데요?"
"저... 김종대 씨."
 
 
 
고개를 들어 촘촘하게 들어선 나무들을 보던 종대는 경수에게로 초점을 두었다. 대리석 벽과 어울릴 법한 정장 차림이 아니라 깔끔한 데님 셔츠 차림이 이곳과 잘 녹아들어 또 하나의 좋은 풍경인 그는 어쩐지 긴장되어 보이는 표정이다.
 
 
 
"결론부터 말하고 싶지만, 덧붙이자면 해드리고 싶은 게 많습니다."
"......"
"그리고 저는 김종대 씨와 조금 더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진부한 말일 수 있겠지만."
 
 
 
난데없는 고백에 말이 갈 바를 잃고 머리에서만 맴돌았다. 아, 저는...
 
 
 
"지금 응답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갑작스럽겠지만 계속 생각을 해 왔는데, 우리..."
"아, 저는..."
 
 
 
겨우 느리게 사고하는 머리를 멈추고 말을 꺼내었을 때, 종대의 여백 같은 말과 동시에 경수의 입술이 떨어졌다.
 
 
 
"같이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배웅해주고, 같이 있자고. 네가 없으면 결국 도래하지 않을 당장 가까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
 
 
 
 
 
 
 
 
 
 
 
수업이 끝난 학생들로 번잡한 인문대 앞, 차를 세운 경수는 연신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침들이 6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한쪽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나오고도 남았을 시간임에도 감감무소식이다. 안 되겠다 싶어 이렇게 속을 까맣게 태우는 장본인의 단축번호를 누름과 동시에 창을 똑똑 두드리고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는 분홍 셔츠 차림의 종대다. ‘히-’ 하는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늦게 들어간 학교가 재미있는지 요즘 부쩍 표정이 좋다. 경수는 손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시트로 몸을 구기는 종대의 익숙한 옷차림을 보니 그렇게 지지고 볶던 시절로부터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나 싶다. 감상은 감상이고, 서운한 티는 좀 내야겠어서 안전벨트를 하려고 몸을 튼 종대의 어깨를 돌려서 저를 똑바로 보게 만든다.
 
 
 
“뭐 하느라 이제야 옵니까.”
“카톡 확인 또 안 하셨죠?”
 
 
 
그럼 종대는 적반하장으로 픽 몸을 돌리고 앞만 딱 보는 것이다. 아, 카톡. 그제야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종대: 조별 모임ㅜㅜ 10분만 기다려주세요. 미안해요(하트)
 
 
 
경수의 눈앞이 점점 캄캄해진다.
 
 
 
“아, 제가 확인을...”
“괜찮아요. 원래 확인 잘 안 하니까.”
 
 
 
“종대야,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
“아니, 나는 형이...”
“서운해도 얼굴 좀 보자, 응?”
 
 
 
저를 계속 보지 않는 종대 때문에 이번엔 목이 탄다. 다시 어깨를 붙잡는 경수 때문에 삐친 체도 제대로 못 하겠다. 보리가 왜 내일까지 말 걸지 말라고 만날 삐친 체를 하는지 알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결국 그를 놀려먹는 것을 포기한 종대가 경수의 뺨에 입술을 말아 쪽 소리가 나도록 붙였다 떼고는 씩 웃는다. 곧 입술에 닿은 뺨이 달아오르고 귓바퀴가 뜨끈해지는 반응이 일어나며 이번엔 제가 종대를 바로 쳐다보기 어려워진다. 종대는 제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숨겨놓은 자물쇠를 너무도 쉽게 열어버렸다. 온 세상이 모두 배경으로 밀려나고 너만 전경이 된다. 모두 사라지고 너만 세상에 가득하다. 유일한 너만이.
 
 
 
밤이라고는 하지만 갓길에 몇 번이나 차를 세우고 조수석 시트를 아래로 내리려는 경수를 겨우 만류했다. 현관을 열자마자 다급하게 입술을 붙이려 해 손바닥으로 막으니 눈썹을 팍 구기고 이마를 마주 댄다. 왜 자꾸 나를 밀어냅니까. 그러면 정말로 할 말이 없어진다. 보리 있으면 어떡해요. 회사에서는 그렇게 이성적이고 냉철한 어쩌고라고 하는데 순 개뻥인 듯하다. 경수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는 덕에 둘은 아직 신발장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우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 뭡니까. 부사장님.
“우진아. 보리 좀 부탁할게.”
- 에? 또요?
“급해서. 끊는다.”
 
 
 
그리고 뚝 끊어진 전화. 우진은 부르르 떨었다. 확 진짜 때릴 수도 없고. 지금 열심히 공사에 착수 중인 건물로 인해 부사장 자리에 앉은 경수는 눈에 뵈는 게 더 없어졌다. 제집에서 아들 녀석과 나란히 도경수가 들여놓은 티비로 뽀로로를 보고 있는 보리를 보니 한숨이 나온다. 같이 살자고 했던 날, 고개를 끄덕인 종대의 짐을 몽땅 싸 들고 이사를 감행해 본격적으로 같은 집에서 살고부터 허구한 날 이렇게 베이비 시팅을 시키고 앉았다. 한마디 할 성 싶으면 제집에 뭐가 고장이 났고, 뭐가 노후화 되었는지를 귀신같이 알고 멋대로 좋은 것을 보내곤 해 말도 못 하게 하는 악마 도경수. ‘삼춘! 나 배고파!’ 이제 저를 아저씨가 아니라 삼촌이라고 부르는 보리가 칭얼거리자 아들 녀석까지 김치 볶음밥을 해달라고 명령이다. 응응, 알았어. 팔자 뜯어고치는 건 아예 글러 먹은 우진이 속히 부엌으로 걸음을 옮긴다.
 
 
 
경수는 폰을 대충 아무 데나 툭 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암순응한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질반질한 입술을 쫓는다. 센서 등이 꺼지도록 아무런 대답을 않고 머뭇대기만 하는 종대를 가만 내려다보던 경수가 허리를 숙여 느릿하게 손을 종대의 발목으로 가져다 댄다. 손날로 밀어 신발을 벗기고 발뒤꿈치를 쓴다. 반대쪽도 똑같이 신발을 벗긴 경수가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이제 키스해도 될까.”
 
 
 
입술을 축이며 묻자 곧 목으로 작은 손이 감기고 어깨로 파묻힌 고개가 끄덕여진다. 손을 더듬어 턱을 찾아 쥔 경수가 눈을 감고 고개를 튼다.
 
 
 
 
 
 
 
 
 
어떠한 낮보다 찬란할 밤이 시작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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