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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힘

w. 다넬 (@dyowchen)

 

 

 

 

도경수×김종대

 

 

 

* * *

 

 

 

 

달그락 달그락. 접시에 부딪치는 나이프와 포크 소리가 넓은 방안을 채웠다. 어른들끼리는 사업에 대한 대화가 오갔고 갓 살림을 차린 형들은 형수들이 낯선 가족 모임에 적응하도록 도왔다. 그 속에서 종대는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포크로 완두콩 한 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의미 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지루하고 따분하다. 서너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양가의 식사자리는 종대에게 그랬다.

 

한 가족도, 사돈 관계도 아니었지만 두 가족은 아주 오래 전부터 꼭 이렇게 정기적으로 모여 식사 자리를 갖곤 했다. 이유인즉 종대의 할아버지 뜻이었다. 양쪽 어른들 사이도 좋고 마침 똑같이 슬하에 둔 두 아들들도 짝을 맞춘 듯 동갑내기인 덕분에 오랜 친구 사이였으니, 할아버지가 안 계시더라도 종종 자리가 마련되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할아버지가 D그룹의 총수인 도회장을 아들처럼 아꼈기 때문이다.

 

 

“정신 사납게 그러지 말고 밥이나 마저 먹지 그래.”

 

 

맞은편에서 경수가 낮게 속삭였다. 또 제가 하는 짓을 보고 혀를 찼을 테다. 종대가 손을 멈추고 힐긋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경수가 눈썹을 까딱이며 어서 들라고 손짓을 했다. 이럴 때 보면 하는 짓이 형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먹는다. 먹어.”

“심심해?”

“응.”

“거의 끝나가니까 조금만 참고, 허리 펴고 앉아. 다 큰 남자가 그러고 있으면 품위 없어 보인다니까.”

 

 

구부정한 자세를 지적받는 것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종대는 토 달지 않고 냉큼 자세를 정돈했다. 나이를 먹어도 천상 막내 같은 성격은 어디 안 갔으나 재벌가 자제답게 교양 없고 품위 없는 일은 질색했다. 종대가 말을 잘 듣자 경수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식사 끝나셨다.”

 

 

경수가 작게 언질 해주자 종대가 상석으로 눈길을 던졌다가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보고 쾌재를 불렀다. 이제 디저트 먹으면서 티타임만 가지면 끝난다. 종대가 마지막 남은 덩어리를 자르지도 않고 입에 우겨넣자 경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보기 흉한 모양이다.

 

 

“늦장부리다가 그렇게 먹지 말라니까.”

“에이, 잔소리 사절―”

 

 

꼭꼭 씹어 삼킨 종대가 보란 듯이 씨익 웃었다. 조금 있으면 서른 중반인 남자가 저렇게 해맑기도 힘들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 * *

 

 

 

식사가 끝난 후 이대로 집으로 가면 더 심심하다며 칭얼거리는 종대 때문에 경수는 제 차의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제 차를 비서에게 부탁하고 경수의 차에 올라탄 종대가 길게 기지개를 폈다.

 

 

“아우우―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네.”

“할아버지 서운해 하시겠다.”

“모여서 재미있는 걸 하면 나도 좋아하지. 매번 식사하고 골프치고―”

 

 

식사와 골프. 확실히 종대의 관심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경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랑 있어도 딱히 더 재미있는 걸 하는 건 아닌데.”

“넌 친구니까 하다 못 해 수다라도 떨잖아. 아, 너 저번에 선 본 거 어떻게 됐냐?”

 

 

무슨 얘기가 나올지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서른둘이나 먹었지만 어른 특유의 진중함이 없는 제 오랜 친구를 보며 경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들처럼 친구들 선 본 얘기, 연애사 같은 거나 궁금해 하고 말이야.

 

 

“별로여서 식사만 하고 헤어졌어.”

“어, 왜? B그룹 막내딸이었다며. 귀엽게 생겼다던데.”

“말이 너무 많아.”

“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유를 묻던 종대는 심플하게 떨어진 대답으로 경수의 반응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내 주위에 말 많은 사람은 너 하나로 족해.”

“그럼, 그럼. 우리 경수 말 많은 사람 아―주 질색하는 거 내가 잘 알지.”

 

 

입버릇 같은 대사에 종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엉아가 이―쁘고 벙어리인 재벌가 딸 만나면 꼭 너 소개시켜줄게?”

“어. 꼭 해줘. 안 해주면 니 백화점 주식 폭락하게 만들 거야.”

“뭐어? 야, 그럼 진짜 죽는다아아아!”

 

 

결국 흥분한 종대가 소리를 빼액 지르고 말았다. 의도한 대로 이긴 느낌이라서 경수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 * *

 

 

 

종대에게 경수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삭막한 이 바닥에서 몇 안 되는 진정한 친구이자 불알친구였고 자세하게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친애하는 D그룹 도정민 회장의 차남이었다. 할아버지에 의해 태어난 순간부터 소울메이트가 될 운명인.

 

할아버지가 엮은 운명이긴 했지만 둘 중 누구도 소울메이트가 생긴 것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아무리 태어난 순간부터 붙어 다녔어도 성격이나 성향이 상당히 안 맞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차이도 나름대로 상호보완적 관계로 승화시켰다. 쉽게 말하면 덕분에 경수는 종대 같은 사람들을 대할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고 종대는 경수 같은 사람들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게 되었다.

 

집안의 차남들인지라 회사의 후계자 자리는 형들에게 돌아갔지만 경영 수업을 꾸준히 받은 결과 서른을 넘긴 해부터는 종대와 경수도 각각 백화점과 호텔, 그리고 그 외에 잡다한 건물과 땅을 물려받았다. 또한 대표 이사 취임과 동시에 근처 땅에 집을 지어 분가해서 살고 있었다. 경수는 드디어 편안한 안식처가 생겼다고 뿌듯해 했지만 종대가 생각보다 자주 놀러와 계획을 망치는 중이었다.

 

 

 

“아…. 목말라.”

 

 

지난 밤 자정이 지나고서야 집에 돌아온 종대는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가 방금 막 깨어나는 중이었다. 까슬한 목을 쓸어내리고 협탁에 올려둔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을 넘기자 정신이 좀 들었다. 슬슬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으로 물 컵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순간 보게 되었다. 안쪽 손목에 자리한 전에 없던 무언가를.

 

 

“이게 뭐지….”

 

 

처음엔 눈을 비볐고 그 다음엔 손목을 벅벅 문질러 보았다. 뭐야, 이게? 이게 대체 뭔데? 조금도 지어지지 않은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종대는 멍한 얼굴로 손에 물을 묻혀 닦았다. 그러나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뭐야, 뭔데 이거!”

 

 

정신이 확 든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했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잠이 싹 달아나버렸고 종대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말도 안 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대체 왜 도경수 이름이 내 손목에 있지? 종대는 세면대에 팔을 담구고 비누 거품을 내서 손목을 닦아보았지만 손목에 새겨진 이름은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뭐냐고 이게―”

 

 

마른 팔뚝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벅벅 문지르던 종대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게 뭐냐고…. 지워지지 않는 건 둘째 치고 더 큰 문제는 이게 어떻게 새겨졌냐는 것이었다. 이 넓은 집안엔 저 혼자였고 어제 술 마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정신으로 잠들었다. 그런데 손목에 제 이름도 아니고 경수의 이름을 쓰는 미친 짓 했을 리가! 게다가 필체도 너무나 정갈했다.

 

이것이 대체 뭘까 한참 고민하던 종대는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시계 차는 자리에 생겨서 자연스럽게 가릴 수는 있었다.

 

 

 

* * *

 

 

 

종대는 출근한 후에도 시계를 풀고 그 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변비서를 통해 오일을 가져다 지워봤지만 그대로인 것이 영락없는 문신이었다. 이게 뭐냐 진짜…. 마른세수만 반복하다가 결심한 듯 인터넷 창을 열어 검색도 여러 번 했지만 아무런 정보도 뜨지 않았다.

 

한창 검색에 열중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종대는 황급히 인터넷 창을 내렸다. 곧 문을 열고 변비서가 들어왔다.

 

 

“사장님 어디 아프세요?”

“그런 거 아냐.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어?”

“왜긴요. 결제죠.”

 

 

함께 일한지 3년이나 된 동갑내기 비서다보니 초반에는 군기 바짝 들어가 있던 변비서도 슬슬 종대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이게 아닌데 싶은 종대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진짜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김선생님께 이따 들리라고 전화해둘까요?”

“내가 할게.”

“거봐요. 어디 아픈 거 맞죠?”

“아픈 건 아니고.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말끝을 흐리자 변비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무슨 얘기인지 말해주길 기대하는 눈치였으나 종대는 당연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변비서가 축 처진 눈꼬리를 더욱 늘어뜨리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응.”

“저한테도?”

“응.”

“너무해요!”

“결제 다 했어. 가져가.”

“사장님 미워요!”

 

 

저게 뭘 잘못 먹었나…. 미워요? 너무 풀어줬나 봐. 변비서가 사라진 문을 보며 종대가 머리를 긁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전화를. 정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종대가 익숙한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 종대보다 한 살 많은 주치의는 약속을 급하게 잡으면 스케줄 꼬이게 한다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여보세요.]

“형, 나야.”

[어, 웬일이야. 어디 아파?]

 

 

사실 말이 주치의지 준면은 종대의 대학 선배였다. 재벌 3세라는 사회적 지위 상 큰 병이 아니고서야 병원에 들락날락할 수 없으니 의사인 준면이 종종 집으로 오는 식이었다.

 

 

“아픈 건 아닌데 몸에 이상한 게 생겼어. 와서 좀 봐줘.”

[이상한 거?]

“응. 설명해도 못 믿을 거야. 와서 직접 봐봐.”

[알았어.]

 

 

전화를 끊은 종대가 다시 경수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을 쳐다보다가 이내 시계를 다시 찼다. 손목에 새겨진 친구의 이름이라니,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 * *

 

 

 

준면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종대의 집을 찾았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하게 자리에 앉은 준면은 종대가 옆에 앉자 바로 진찰을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이상한 게 생겼다니?”

“혹시, 자고 일어났더니 다른 사람 이름이 몸에 새겨지는 병도 있…어?"

“이름?”

“응.”

 

 

누가 들어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종대가 괜한 짓을 한 건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준면은 의외로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몇 년 전에 피부과 선배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 일부 사람들한테는 신체 부위에 운명의 상대 이름이 있다고.”

“운명의 상대?”

“그래, 그게 나중에 생기는 사람도 있다는데 너한테 생긴 게 네임이 맞으면 너는 후자인 케이스지.”

“그럼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어떡해?”

“소울메이트니까 평생 함께 하는 거지. 그런데 찾기 여간 쉽게 않을 걸. 궁금하다, 니 운명의 상대. 혹시 나한테 보여줄 수 있어?”

 

 

준면의 물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종대가 왼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끌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한 채 감춰졌던 네임을 드러내자 준면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종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얘기 진짜야? 믿어도 되는 얘기야?”

“응.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는데 네임에 대한 연구는 이미 예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들었어. 소울메이트를 찾아주는 기관도 운영되고 있더라고.”

“아, 어떡해….”

 

 

설명을 들은 종대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몸을 옹송그리고 머리를 헤집었다. 말도 안 돼…. 어떡해…. 간간히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준면이 종대의 등을 토닥였다. 종대는 한참 만에 진정이 되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형 말은, 경수가 내 운명의 상대라는 거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본 종대는 제가 뱉어놓고도 영 이상한 느낌에 미간을 팍 구겼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말도 안 돼. 왜 내 운명의 상대가 남자인 걸로도 모자라서 도경수인데? 장난이지 형? 이거 다 몰카라고 말해줘- 소파에 널브러지듯 기댄 종대가 발을 구르며 징징거렸다.

 

다시 튀어나온 어릴 적 버릇을 보며 혀를 찬 준면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로 간략하게 끝난 통화를 마친 준면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자리에 앉아 종대를 진정시켰다.

 

 

“그만 징징거리고 일어나서 이리 와봐. 아까 말한 그 선배가 네임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쪽 연구하는 사람들 인맥도 많이 생겼거든. 기본적인 자료는 가지고 있어서 나한테 지금 보내주기로 했어.”

“진짜?”

“응, 내가 알려줄 건 그냥 기본적인 것들이고 니가 가장 곤란해 할 문제는, 아쉽지만 대신 해결해줄 수 없어. 운명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본인들이 결정해야 해.”

 

 

종대가 다시 시무룩해하는 사이 메일함에 들어간 준면은 PDF파일을 실행한 준면이 스크롤을 쭉쭉 내리며 말했다.

 

 

“너한테 필요한 얘기는… 이거 같은데, 상대가 사망했거나 아직 출생 전이거나 혹은 노네임(No-Name) 상태면 이름이 흐리대. 근데 넌 선명하잖아.”

“어? 그럼….”

“경수 몸에도 있는 거야. 네임이.”

 

 

예상치 못한 말에 종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그럼 왜 말 안 했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어.”

“손목에 생기는 걸 어떻게 몰라?”

“네임은 손목에만 생기지 않아. 내가 전에 봤던 사람은 여자였는데 뒷목에 아주 흐릿한 네임이 생겨서 머리를 묶어도 잘 보이지 않았어.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네임이 있는지도 모르고 결혼까지 한 상태였고.”

“진짜?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했어?”

“그건 나도 몰라. 사정은 전해들은 거고 얼굴만 봤거든. 어쨌든 넌 미리 알게 됐으니까 어떻게 할지 고민해봐.”

 

 

준면은 아직도 표정이 어두운 종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을 해주기 위해 따라 일어난 종대는 준면이 자신과 닮은 하얗게 빛나는 차에 올라타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니가 웬일로 연락을 다 하냐.”

“그냐앙―”

 

 

미리 연락했다고 꽤나 성의껏 차려진 다과상에 마주앉자마자 던져진 질문에 종대가 말꼬리를 늘리며 대충 대답했다. 오늘은 경수의 몸 어딘가에 있을 네임을 찾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기 때문에 종대는 차를 마시며 슬그머니 경수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일단 시계도 없는 양 손목은 휑했고 눈에 보이는 부분에도 이름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답답해진 종대는 고상하게 차를 홀짝이는 경수를 붙잡고 대뜸 말했다.

 

 

“야, 우리 샤워 같이 할래?”

“뭐? 미쳤냐?”

 

 

굉장히 급하고 뜬금없는 제안에 돌아오는 것은 당연히 미친 놈 취급이었다. 그러나 그런 취급에 굴하지 않은 종대는 붙잡은 옷깃을 흔들며 징징거렸다.

 

 

“아, 왜애― 옛날엔 자주 했잖아. 같이 샤워 한 번 해―”

“그게 몇 년 전인데, 20년 전이야. 갑자기 왜 이래, 징그럽게 진짜.”

 

 

결국 경수에게 딱밤 한 대 얻어맞은 종대는 얌전히 경수를 따라 차나 홀짝였다. 그러나 오늘 꼭 경수의 네임을 찾아내겠다고 작정하고 온 종대는 차를 다 마신 후에도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중천에 떠있던 해가 사라져 주위가 캄캄해질 때까지도 종대는 한가롭게 TV 따위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 한 경수가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한마디 했다.

 

 

“너 집에 안 가냐?”

“자고 갈래!”

“누구 맘대로. 싫어.”

“아, 왜애애― 좀 자고 가자―”

“오늘 따라 왜 이래, 정말?”

 

 

어이가 없어진 경수가 짜증을 냈지만 작정하고 고집부리는 종대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항복한 경수가 손님방을 내주려고 했지만 종대가 우기고 우겨서 한 침대에서 자는 것까지 성공했다. 경수가 의외로 종대에게 져주는 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경수는 반팔 티셔츠에 아래는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다리에 열이 많다고 하의탈의 하고 자는 경수를 알기에 한 침대를 고집했던 것이었다. 이왕이면 발견하기 편하게 하체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기대와 달리 깨끗한 다리를 보며 생각했다. 상체 쪽이구만. 매의 눈으로 스캔하고 자리에 누운 종대는 다음번엔 꼭 샤워를 시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잠들었다.

 

그러나 종대가 경수의 네임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린 것이 있었으니….

 

 

“야, 너 이거 뭐냐?”

“으응….”

“이거. 뭐냐고 이거. 문신?”

“어…?!”

 

 

막 눈을 뜬 종대의 앞에 있는 건 방금 씻고 나왔는지 샤워 가운 차림에 머리칼은 축축하게 젖은 채 제 손목 들고 팔랑팔랑 흔들고 있는 경수였다. 물기가 남은 손에 붙잡혀 흔들리는 손목으로 시선을 옮긴 종대는 심하게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대의 손목을 놔주고 허리를 펴고 선 경수가 팔짱을 척 끼고 종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게에….”

“설명해봐.”

 

 

영락없는 명령조였다. 난처해진 종대가 울망한 눈으로 경수를 쳐다보았지만 경수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경수 나름대로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결국 한숨을 푹 쉰 종대가 제 네임을 보며 준면에게 들었던 내용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듣고 있는 경수의 표정은 전혀 좋지 못하게 변해갔다. 종대가 경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니까아 결론은 우리 둘이 운명…이라고. 니 몸에도 내 이름이 있댔어.”

“…….”

“…….”

“그걸 믿어?”

“어?”

“뭐, 믿는다 치자. 그래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너랑 내가 운명이라고, 부모님께 우리가 운명입니다 하고 살림이라도 차리는 게 가능할 것 같아?”

“…….”

“괜히 헛소리에 혹해서 뻘짓 하지 마라. 내가 그런 거 질색하는 건 말 안 해도 잘 알잖아.”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돌아온 거절의 말은 꽤나 충격적인 것이라 종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경수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감쳐무는 것을 본 경수는 한숨과 함께 방을 나갔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종대는 경수가 나간 문을 한 번, 정갈하게 새겨진 경수를 이름을 한 번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급하고 뜬금없었구나. 운명이라는 말에 애틋해져서 앞뒤 안 보고 행동해버린 것이 후회가 됐다. 경수의 말대로 현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써 네임을 가려버린 종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외출했는지 고요해진 집안을 보며 조금 속이 상했지만 종대는 마찬가지로 잊어버리기로 했다. 익숙하게 어제 입고 왔던 옷을 챙겨 입었고 주차해둔 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나한테 있는 네임은 어쩌지. 지워버리는 건 불가능하려나…. 아쉬운 생각을 하면서.

 

 

 

* * *

 

 

 

종대는 집으로 돌아온 후 곧장 네임을 지울 방법을 찾았지만 준면의 만류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능은 하지만 부작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네임만 보면 기분이 복잡해져서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현재로썬 안 보고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르륵 책상 위를 구르는 펜을 따라 종대의 눈이 그것을 쫓았다. 요즘 들어 저기압인 종대 때문에 변비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왠지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대놓고 묻지는 못하고 기분 풀어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찾은 것이 종대가 가장 흥미를 보이는 소식이었다.

 

 

“사장님! 제가 사장님이 궁금해 할 소식 알아왔는데요!”

“뭔데?”

“도사장님이요. 내일 선 보신답니다.”

“뭐?!”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종대가 기가 막혀서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상대가 누군데?”

“S그룹 둘째 딸이요. 예쁘고 성격이 천상여자라서 딱 도사장님 취향인 게 이번엔 잘 될 것 같다던데요?”

“누가 그래?”

“박비서요.”

“찬열 씨가?”

“네.”

 

 

냉큼 나온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종대가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라, 이상하다. 분명 이 다음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을 들었다는 듯 꼬치꼬치 캐물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갈수록 시무룩하게 변하는 종대의 표정을 보며 변비서는 혼란에 빠졌다.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종대가 기대한 것에서 한참 벗어난 반응을 보이자 변비서 역시 덩달아 안절부절 못하다가 물었다.

 

 

“사장님?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지세요?”

“어? 아니, 아니야. 알려줘서 고마워. 나가봐.”

“에? 더 궁금한 거 없으세요? 저 그냥 나가요?”

“응! 괜찮아.”

“예….”

 

 

변비서는 조금 더 있고 싶었으나 제 상사가 친절 고개를 끄덕이며 퇴장을 요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장실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도사장과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변비서가 나가기 전 힐긋 돌아본 종대는 다시 실의에 빠진 표정이었다.

 

 

 

* * *

 

 

 

내가 점점 미쳐가는 것이 분명해. 종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담한 일을 벌일 리 없었다. 종대는 꼭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고 드디어 시야에 걸리는 경수의 뒤통수를 보고 다시 눈을 꼭 감아버렸다.

 

경수가 선보는 장소는 늘 한결같았고 한참을 고민한 결과 도저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부랴부랴 퇴근하고 온 곳이었다. 한동안 선 볼 생각 없다더니 누가 봐도 자신을 의식해서 마련한 자리임이 분명해서 괘씸한데 그 와중에도 단정하게 차려입은 뒤태는 솔직히 멋있었다.

 

아,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걸까. 잘난 뒤통수를 노려보며 냉수만 들이키던 종대는 이제 약속시간이 정말 별로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고민에 빠졌다. 가? 말아? 한숨을 푹 쉬며 마지막까지 심사숙고한 결과 자리에서 일어난 종대는 침착하게 뚜벅뚜벅 걸어가 경수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마주친 잘난 얼굴은 조금 놀랐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목소리 낮추고. …니가 진짜 그 이름에 단단히 홀렸구나. 내 선 자리 파토 낼 생각까지 하고.”

“그 여자 니 짝 아니야.”

“그럼. 너라고?”

“그래.”

 

 

오기로 한 대답이었는데 뱉어놓고 종대는 후회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34년 지기 친구에게 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말이었다. 단번에 나온 대답에 경수도 조금 당황했는지 눈썹을 찡그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 짓까지 한 정성과 용기가 가상해서 마지막으로 져줄게.”

“어?”

“따라 와. 그 대단한 이름 있나 없나. 확인 시켜준다고.”

 

 

 

* * *

 

 

 

경수를 따라 들어간 어두컴컴한 집안은 분위기 때문인지 조금 낯선 느낌마저 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주 들락날락해온 집인데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먼저 들어간 경수가 버튼을 누르자 집안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미리 말하는데.”

“…….”

“이름 같은 거 없으면 죽인다.”

 

 

정장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어놓은 경수가 이를 갈며 말했다. 안 그런 것 같았는데 조금 화가 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종대의 시선은 땅으로 꺼졌다. 미안하고 민망해서 뒷목을 쓸어내리는데 경수는 그 모습에 넥타이를 풀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경수는 종대가 보는 앞에서 셔츠와 런닝까지 차례로 벗었다. 단단한 팔뚝이며 복근이며 예상과 달리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자 종대는 조금 놀랐다. 어렸을 땐 체구가 작아서 종대가 종종 놀리곤 했는데 그 여파로 운동을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종대가 약간 감탄하며 경수를 쳐다보자 경수가 다가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리 쪽은 저번에 다 스캔했지? 어쩐지 내 침실에서 안 나가더라.”

“기분 나쁘지. 미안.”

“별로. 근데 지금은 야동 찍는 느낌이라 기분 되게 별로거든? 그 네임인지 뭔지 있나 빨리 확인해. 옷 입게.”

“아, 알았어.”

 

 

경수가 침대에 앉아 투덜거리자 퍼뜩 정신을 차린 종대가 경수의 상체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분명 경수의 몸 어딘가에 정갈하게 새겨진 제 이름이 있을 텐데….

 

 

“어… 왜 없지?”

 

 

예상과 다르게 경수의 상체 어디에도 종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이 가득 들어차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이 경수를 쳐다보자 경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를 갈며 말했다.

 

 

“거봐, 내가 그런 거 없다고 했잖아.”

“하지만, 형이…!”

“김종대.”

“…….”

“…그만해.”

 

 

어딘지 절박하게 들린 말에 종대는 입을 다물고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종대는 어떡해야 하나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입술만 짓이기다가 결국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집안에서 인기척이 사라지자 창문 앞으로 다가간 경수는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하얀 차를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 * *

 

 

 

종대는 그날 이후로 병가를 낸 채 집에 틀어박혀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밥도 거의 거르고 실연당한 사람마냥 울다가 잠들고, 멍하니 시간을 죽이다가 잠들고를 사흘 동안 했더니 나흘째부터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울기를 그치고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종대는 먼저 연락할 용기가 없었기에 경수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수에게선 연락 한 번 오지 않았다. 워낙 자주 보고 막역한 사이다보니 필요한 연락만 주고받았기 때문에 연락이 없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 연락 한 통 없는 건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종대는 일어나자마자 손목만 붙들고 있었다. 왜 없었을까. 제게 있는 이름은 이렇게나 선명한데. 울적한 기분으로 경수의 이름을 만져보던 종대는 여전히 조용한 핸드폰을 보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운명을 잡고 싶었던 게 제 욕심이었나. 아니, 운명이라면 결국에 이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이어지지도 않을 거면 그게 어떻게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운명이라면서, 어째서 저는 이런 식으로 끝났는지 종대는 억울하고 속상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운명이라기에 30년 넘은 우정을 깨트리고 선을 넘었던 것인데 결국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다시 친구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34년 인생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느낌이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조금 더 자보려던 차에 종대의 핸드폰이 울렸다. 급하게 눈을 뜨고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기대와 달리 변비서였다.

 

 

“왜.”

 

 

일주일동안 울고불고 한 것의 여파인지 예상한 것보다도 목소리가 엉망으로 나왔다. 변비서도 놀랐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사장님 맞으세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아프신 거 맞는데요, 뭘. 아파서 쉰 건데 더 심해지셨잖아요. 김선생님은 다녀가셨어요?]

“괜찮다니깐. 형한테 얘기 하지 마. 그 정도 아니니까.”

[얼른 나으세요…. 도사장님이 걱정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뭐?”

[아까 박비서한테 연락 왔거든요. 사장님 출근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랬다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 병가 내고 일주일 째 결근 중이라고?”

[네.]

 

 

아 이 도움 안 되는 비서 같으니라고! 전화를 들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듯 잡은 종대가 말했다.

 

 

“넌 출근하면 보자.”

[에?!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

 

 

전화를 끊어버린 종대가 신음을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척 하고 싶었는데 아주 못 지내고 있다고 광고한 꼴이 되어버렸다.

 

내일부터라도 다시 출근해야지….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괜찮은 척 해야지….

 

 

 

* * *

 

 

 

종대는 어느새 시체같이 변한 몰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폐인 생활을 하면 이렇게 되는 게 큰 문제였다. 못 지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TV를 틀었다. 그러나 열심히 보지는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익숙한 도어락 소리가 들리자 종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

 

 

비밀번호를 괜히 알려줬다는 생각이 5년 만에 처음으로 들었다. 들어오자마자 종대의 몰골을 본 경수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종대가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나 원래 살 잘 빠지는 거 알잖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는 오히려 역효과만 준 모양이었다. 경악스러운 표정에 이어 경수의 미간이 좁혀졌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얼굴을 하던 경수가 손에 든 비닐봉지들을 내려놓고―단식투쟁을 예상했는지 장을 봐온 것 같다― 종대에게 다가왔다.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아냐, 그런 거.”

“그럼 밥을 왜 안 먹어.”

“입맛이 없으니까.”

“내가 신경 쓸 건 생각도 안 하지?”

 

 

계속 되는 호통에 종대가 입을 쭉 내밀었다.

 

 

“니가 날 왜 신경 써. 우리 이제 친구도 뭐도 아닌데.”

“친구가 아니,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돼? 정말 운명이니 뭐니 하면서 나랑 그러고 싶다고?”

“니가 손목에 내 이름 새겨놓고 그거 보고 있어봐. 볼 때마다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힘들다고 나도.”

“정리해, 그거. 오래 안 걸려.”

 

 

체념하듯 나온 말에 종대가 발끈 했다.

 

 

“니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내가 해봤어, 종대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흔들지 마.”

“뭐?”

“…….”

“그게 무슨 말이야….”

 

 

경수가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경수에게 네임이 발현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인 열네 살 때였다. 어느 순간부터 몸에 새겨진 종대의 이름은 아주 흐려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한창 사춘기를 앓았던 경수였지만 경수는 제 몸에 새겨진 소꿉친구의 이름이 소중했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찾아온 경수의 첫사랑이었다.

 

소년의 열병은 다른 이들과 아주 흡사했다. 은근슬쩍 부모님께 종대와 같은 동네로 이사 가기를 부탁해보기도 하고 생각 날 때마다 종대와 문자를 주고받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수다를 떠는 것들이 어린 경수에게 있어선 인생의 낙이었다.

 

경수가 네임에 대해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제 몸 은밀한 곳에 새겨져있던 영문 모를 이름은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흐리기만 한 네임을 보며 경수는 만감이 교차했다. 종대가 너무 좋았고 네임을 보면 애틋한 기분이 들었지만 D그룹의 차남으로 얼굴이 알려진 자신이 독신으로 살게 되었을 때, 사실처럼 퍼질 온갖 추측들과 혹은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났을 때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고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물론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부모님께 네임에 대해 설명할 용기도 없었다.

 

결국 경수가 선택한 방법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숨기는 것이었다. 결혼 적령기가 다가옴에도 여전히 흐린 네임을 보며 경수는 차라리 종대에게 평생 네임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선 자리에 나가곤 했다. 그러나 서른네 살이 되던 해에 결국 진하게 변해버린 네임을 보며 경수는 다시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앞으로 종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종대에게 연락이 왔다. 만나기 직전까지도 바짝 긴장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에 종대는 예상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급하게 다가왔다. 그때 경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린 날의 자신이었다. 네임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현실의 벽에 부딪쳐 절망하던 자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수는 그 순간 오랫동안 숨겨왔던 마음을 끝까지 숨기기로 마음을 굳혔다. 종대에게 매몰차게 굴수록 마음이 아렸지만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종대가 저와 같은 고민을 하다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속여서 미안.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봤는데 내 결론은 그래. 우리가 운명이어도 달라지는 건 없어.”

“…….”

“…….”

“그럼 너한테도 내 이름 있는 거야?”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돌아오는 것은 배신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심지어 조금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예상과 다른 종대의 반응에 경수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대답해줘. 있어? 내 이름.”

“그래.”

“그때 확인 했을 땐 없었잖아.”

“확인 안 한 곳이 있으니까.”

“어디? …설마,”

“안 가르쳐 줄 거야. 이상한 상상 마.”

“치사해.”

 

 

종대가 입을 쭉 내밀었다. 네임이 있다는 말에 안심했는지 한순간에 가벼워진 분위기 때문에 경수가 머리를 짚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말려든 기분이라서 매우 찝찝했지만 일단은 종대가 기운을 차린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경수가 바닥에 내려두었던 봉투를 들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종대가 뒤를 졸졸 쫓아왔다.

 

 

“너 좋아하는 거 사왔으니까 차려달라고 해서 먹어. 부탁인데, 제발 굶지 마.”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경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렇게 손수 장을 봐오고 냉장고를 채워야만 밥을 먹을 건지, 원. 여전히 감당 안 되는 버릇이었지만 눈으로 냉장고 속에 들어가는 식자재를 쫓는 모습이 볼 만 했기 때문에 잔소리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오늘은 단식투쟁을 끊으러 왔으니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 * *

 

 

 

“뭐야.”

“뭐긴.”

“진짜 몰라서 묻는다. 왜 왔어.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접대용 테이블 앞에 제 사무실마냥 앉아있는 종대를 보고 경수는 기가 막혔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해골 같았던 몰골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다시 들이대도 좋다고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안 된다고, 우리는.”

“드라마 여주인공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봐.”

 

 

제 말을 드라마 대사쯤으로 폄하해버리는 종대를 보고 경수가 눈을 굴렸다. 이제 완전히 살아났다, 이거지? 경수가 한숨을 쉬며 맞은편에 앉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너희들 결혼 안 하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할 거야.”

“솔직하게 말씀 드려야지. 괜히 거짓말 했다가 일 커지면… 으, 싫어.”

“허락하실 것 같아?”

“글쎄…. 사돈 못 맺어서 아쉽다는 말 입에 달고 사시는 분들인데 그래도 승산 있지 않을까? 나한테 매번 ‘종대가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잖아.”

“그건 니가 정말 여자였을 때 얘기지. 100번 양보해서 허락해도, 이상한 소문 돌거나 추측 기사라도 나면?”

“내 변호사 만나는 거지, 뭐.”

“그래도 타격은 받을 거 아냐. 니 백화점이랑 내 호텔 주식 떨어지면,”

“경수야, 넌 나보다 호텔이 소중해?”

 

 

입을 삐죽이며 묻는 질문에 경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했다간 전부 다 신경 쓰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러나 아닌 것은 바로 잡아야 했기 때문에 경수는 입을 열었다.

 

 

“그야,”

“난 백화점보다 니가 소중한데.”

“아니, 나라고 호텔이 더 소중한 건 아닌데.”

“그럼 내가 더 소중한 거지?”

“그래, 그렇긴 한데―”

“그럼 됐네!”

 

 

정말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경수는 한편으론 뿌듯했지만 더욱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

 

 

“쉽게 결론짓지 마. 니 말대로 백화점이랑 호텔 다 버리면 뭐하고 살아.”

“유산 상속 다는 아니어도 일부는 받았잖아. 그동안 벌어둔 돈도 있고.”

“말처럼 쉬우면 좋지. 우리만 타격 입는 것도 아닌데.”

 

 

그 말에 드디어 종대도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 이렇게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그러나 잠시간 생각하던 종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했다.

 

 

“그래도 쇼윈도 부부 행세보단 낫지 않을까? 앞으로도 물의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게이 부부나 쇼윈도 부부나―라고 생각하겠지.”

“그런가. 근데 있지, 부부 얘기 나오니까 지금 되게 결혼 준비 하는 것 같다.”

“농담으로 넘기지 마.”

“치….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로 고민해. 아무도 모르게 우리 둘이 잘 살 수도 있잖아. 너도 그게 좋지 않아?”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잖아.”

“힘들면 또 어때. 난 너랑 이렇게 마주 보고 실랑이하는 것도 되게 좋은데.”

 

 

히히 웃는 얼굴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슴 철렁할 정도로 종대의 웃는 얼굴은 예쁘다.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떻게 저 얼굴에 대고 이 이상 실랑이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심각한 얼굴을 하던 경수도 결국엔 피식 웃어버렸다.

 

 

“능구렁이 잡아먹었어?”

“설렜지? 설렜지?”

“유치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경수는 이미 입가의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 * *

 

 

 

일찍 퇴근하고 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종대는 경수가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에서 버티더니 기어코 집까지 따라왔다. 원래 한 달에 한 번 꼴은 왔기 때문에 익숙했지만 요즘 들어 거의 일주일 단위로 출석 도장을 찍는 느낌이었다. 경수는 제 집 마냥 당당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종대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안 재워줄 거야.”

“와, 치사해.”

 

 

종대는 한껏 서운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동시에 제 집 안방인양 소파 위로 드러누웠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경수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장이 구겨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팔로 기어간 종대는 야무지게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다. TV를 틀고 모로 누워 자세를 잡기에 경수가 지나가듯 말했다.

 

 

“나 옷 갈아입고 온다.”

 

 

분명 들었을 텐데 종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았다고 대답하거나 하지 않았다. 딱히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경수는 제 침실로 들어갔다.

 

막 바지를 벗어 옆에 있는 의자에 걸어두고 셔츠 단추를 푸를 때였다. 잠그지 않은 문을 열고 종대가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경수야.”

“…….”

“나 정말 보고 싶은데 딱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돼?”

 

 

장난스럽게 하는 말이 아니라서 경수는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자신의 대답으로 인해 관계가 또 한 번 달라질 것을 알았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수도 입 밖으로 내기 싫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이리 와.”

 

 

긴장하고 있던 입꼬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졌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니까 참아야 하고 포기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 했지만 결국엔 이렇게 될 일이었다.

 

빠르게 다가온 종대는 조심스럽게 경수를 끌어안았다. 경수는 조금 놀랐으나 밀어내는 대신 마른 허리를 안아주었다. 종대는 단정한 정장 차림이고 경수는 옷을 갈아 입다만 상태라 모양새는 조금 웃겼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네임이 어디 있는지 그렇게 궁금해?”

“응, 엄청!”

 

 

호기심 어린 얼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종대의 어깨를 눌러 침대에 앉혔다. 피식 웃더니 종대의 손을 끌어다가 속옷의 밴드 부분을 잡고 살짝 내렸다. 그제야 종대는 볼 수 있었다. 툭 불거진 치골 위에 정갈하게 새겨진 제 이름을. 와, 하고 작게 감탄한 종대가 손을 뻗어 네임을 만져보았다.

 

 

“진짜, 숨기기 너무 편하네. 난 손목이라 꼭 가려야 되는데.”

“난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은데.”

 

 

경수가 침대를 짚고 있던 종대의 왼손을 붙잡고 시계를 풀었다.

 

 

“뭐해―”

“이렇게 보니까 새삼 반가워서.”

 

 

니 몸에 새겨진 내 이름이라니 생각해보니까 낭만적이잖아. 가리고 있던 시계가 사라지자 드러난 이름 위로 경수가 입을 맞추었다. 뿌듯하게 웃고 있던 종대는 다시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눈을 접어 웃으며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도 해줘.”

 

 

혼날 걸 각오하고 던진 말이었는데 의외로 경수는 피식 웃었다.

 

 

“그러지, 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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