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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hin Kinda Crazy

w.망고 (@boyzhaven)

 

 

 

평소와 다름없이 집으로 돌아온 경수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경수의 어머니로부터 들려온 그 청천벽력 같은 소리는 성년의 날이 지나도록 제 짝을 찾지 못한,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흑백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경수를 위한 최후의 수단 같은 것이었다. 흑백의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은 성년의 날이 지나도 색色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시력을 잃게 되는데, 스물다섯이 되도록 제짝을 찾기는커녕 될되면 되라는 태도로 변하는 경수를 보며 그의 어머니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짝을 찾았다며 결혼을 하라는 소리를 전했다. 물론 그게 경수의 짝이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구소 같은 곳에 수소문해 겨우 찾았다고 한다. 경수는 되도 않는 소리에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눈을 찡그렸다.

 

 

"다음 주가 상견례니까, 약속 있으면 다 빼.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

 

 

다음 주.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빨랐다. 이름도 모르는 사인데. 경수는 입을 쭉 내밀고 방문을 열었다. 경수는 평소에 눈길도 주지 않던 책꽂이에 올려져 있던 커다란 쿠션을 침대 위로 던지고는 몸도 같이 던졌다. 쿠션에 얼굴을 박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방음이 잘 되는 방 덕인지, 아니면 쿠션 덕인지. 다행히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겨우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경수에게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물론 경수만의 생각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 경수는 제가 참 빠듯하게 살아왔다고 확신했다. 때문에 경수는 우선 다음 주가 되기 전에 자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경수는 자신만의 확고한 고집이 있었기에 그냥 서류에 도장만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나가서 뭘 하던 무슨 상관이람.

 

 

"얘 경수야."

 

닫힌 방문 너머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너 정말 이러다가 실명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래? 집에 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우리 더 이상은 못 늦춰."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쉰 경수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전 운명 이런 거 안 믿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떠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거 절대 안 믿어요. 믿기도 싫습니다. 운명인지 뭔지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저는 그냥 실명이 되면 눈 안 보이는 채로 살 겁니다. 돈 그거, 참 좋네요. 계속 늦출 수 있다면 앞으로도 쭉 늦추는 건 어떠세요?"

 

 

온몸에 근엄을 장착한 경수였다. 귀한 집 외동아들이라고 경수의 부모님은 연구소에 돈을 쏟아 최대한 경수가 세상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너, 그래도 다음 주에 꼭 나와야 돼! 이게 어떻게 마련한 자린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경수는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리 급한 결혼이라도 충분한 만남은 가지겠지.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상견례는 말만 상견례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경수는 제 결혼 상대가 미성년자라는 것에 1차로 놀랬고, 아직 고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았다는 것에 2차로 놀랐다. 아, 그리고 3차로는 그 상대가 소년이라 조금 놀랐다. 꼭 내가 도둑놈 된 것 같잖아. 속으로만 생각하던 그 말을 하마터면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제 아들녀석이 좀 무뚝뚝합니다. 너무 부족한 상대가 아닌지... 하며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경수의 아버지에 경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물만 계속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도경수입니다.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경수의 말 한마디에 꽤 딱딱했던 분위기는 조금 풀어졌다. 경수의 맞은편에 앉은 소년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경수 씨, 긴장 풀어요. 경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 앉아있는 조그만 아이가 저와 결혼을 한다니, 경수는 어른들의 욕심-경수가 자처한 일이지만 경수는 이렇게 생각했다.-이 조금은 무섭다고 생각했다.

 

 

"김종대예요."

 

 

소년은 자신을 김종대라고 소개했다. 경수는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하나, 살짝 고민을 하다 미소로 답했다. 작은 소년은 아주 당찼다. 경수 자신과 무려 11살 차이가 나지만 그 당참은 어디서도 꿇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저 공부 열심히 해요! 이번 시험도 1등 했는데. 하고 어른들을 상대로 재롱을 떨었다. 귀엽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년이었다.

 

 

"밥 잘 먹었습니다. 조만간 뵐게요. 종대 씨도 곧 봐요."

 

 

순식간에 진행된 상견례를 마치고 룸에서 나온 경수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화면을 켜자 쌓여있는 연락들이 수두룩했다. 미련 없이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타를 타고 가버리는 경수였다.

 

 

*

 

 

결혼식도 안 했는데 신혼여행이라니, 심지어 종대와의 만남은 상견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데? 경수의 동공이 방황했다. 그 와중에 나는 누굴 잘 챙겨준다던가 그렇지도 않은데, 하며 혹시라도 종대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하는 경수였다. 서로 아무리 애정 없는 사이라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자는 주의였다. 여행의 목적지는 여름 바다가 아름답기 유명한 곳으로, 많은 연인들이나 가족들이 찾는 곳이었다. 이미 목적지부터 호텔까지 다 잡혀있단 사실에 경수는 이건 신혼여행이 아니라 수학여행이네, 하며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여행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온 경수는 제방 책상 위 올려져 있는 비행기 티켓에 비로소 결혼 아닌 결혼을 실감했다. 경수는 잠시 티켓을 바라보며 소년을 생각했다. 친구들이랑 노느라 바쁠까, 아님 공부하느라 바쁜가. 물론 답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티켓에서 시선을 뗀 경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고 자부하는 경수였다.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는 달이 경수의 방을 밝혔다.

 

 

뭘 했다고 시간은 이렇게 빨리 가는지, 물 흐르듯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지나는 하루하루였다. 현재 경수에게 신혼여행은 휴가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 경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회사일을 이번 주까지만 하면 저에게도 조금 휴식이 주어진다,는 생각 하나로 일주일을 버텼다. 아, 물론 앞에서 했던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은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한 것이다. 회사에선 제발 가길 바라도 가지 않는 시간이지만, 퇴근만 하고 나면 시간이 그렇게 쭉쭉 갔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눈만 잠깐 깜빡이면 벌써 아침이더라. 아버지의 기업에 손쉽게 들어와 낙하산 소리 듣지 않으려 쉬지 않고 일을 한 탓에 피곤이 쌓일 대로 쌓인 경수였다.

 

 

어머니의 말로는 여행 당일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경수의 입에선 이거 그냥 파트너랑 해외출장 가는 거네요,라고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경수 자신은 워낙 연애 같은 것들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주변의 변화에 대해 무감각한 편이라 별 상관이 없었지만 저보다 한참 어린 소년에겐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여행 가면 내가 보호잔데, 갔다 와서도 평생 보호자 하겠지만. 하고 멀뚱멀뚱 허공만 바라보던 경수는 그 애는 날 신경 쓰지도 않을 텐데. 하며 소년의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 괜히 업무에 방해만 되거든.

 

 

*

 

 

신혼여행은 경수와 종대의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여행으로 보냈던 일주일은 나름대로 그 값어치가 있었다. 첫날에는 어색해 선뜻 말을 걸지도 못 했던 둘이다. 오랜 시간 비행을 해야 했지만 둘 사이엔 아무 말이 없었다. 종대는 조그만 화면으로 영화를 봤고, 경수는 책을 읽었다. 몇 시간쯤 책을 읽다 몸이 뻐근해진 경수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종대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 한 편이 저렇게 길었던가. 아까랑 등장인물이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저를 쳐다보는 경수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 그 작은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던 종대였다. 몇십 초 정도 종대를 쳐다보던 경수는 다시 자신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내식을 먹을 때도 그들은 꽤나 다른 취향 덕분에 음식을 선택하는 시간도 조금 소요했다. 저는 한식이 좋아요. 비행기에 타고 처음 들은 종대의 목소리였다. 목소리 한 번 들은 게 뭐라고 좋은 건지, 살짝 얼떨떨해진 경수였다. 저도 그걸로 주세요. 하고 주문을 마치자 둘 사이는 쥐 죽은 듯 다시 고요해졌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선뜻 걸지 않았다.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경수는 저보다 열한 살은 어린 종대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제가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꺼낸 말이 좋아하는 거 있어요?였다. 저는 노래하는 거 좋아하구,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해요. 하며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해 민망해하던 경수와는 달리 종대는 아주 정성스럽게 답을 했다. 종대와 이야기를 나눈 경수는 그 나이 또래와 맞지 않는 주제에 대해 조잘대는 종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싫은 건 아닌지 손을 떼지 않는 종대를 보곤 더욱.

 

 

긴 비행을 끝내고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우선 예약된 호텔로 찾아갔다. 짐을 풀러 방으로 도착한 그들은 뜻밖의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방이 두 개예요."

"그렇죠, 종대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저는 혼자 못 자요. 집에서도 엄마가 늘 재워줬는걸요."

"그럼 큰 방 같이 쓸까요?"

"저는 그러고 싶은데... 저 재워주려면 귀찮잖아요."

 

 

애기는 애기였다. 혼자 못잔다니. 충동적으로 종대에게 귀엽다는 말을 뱉을 뻔했지만 타인을 잘 배려하는 경수이기에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럼 나랑 같이 자요. 경수가 말하자 종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되게 예뻐요, 무슨 색인지는 모르지만. 물론 책으로 다 봐서 이론상으론 파란색이라는 거 알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까요."

"저도 파란색이 어떤 건지 궁금해요."

"원래 바다가 있잖아요, 저기 하늘에 반사돼서 파란 거래요."

 

 

종대가 바다를 보며 말했다. 꽤나 귀여운 종대의 말에 경수는 따로 답을 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동안 바다를 바라보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는 말을 꺼낸 종대였다. 싫으면 저 먼저 들어갈게요...하며 말끝을 흐리는 종대에 경수는 웃으며 같이 가요, 하고 답했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그 넓은 방에는 하필이면 욕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누가 먼저 씻을 건지, 씻고 나서 뭘 어떡할 건지가 문제였다. 종대씨 먼저 씻을래요? 아님 제가 먼저 씻을까요? 경수가 묻자 종대는 편한 대로 하라며 옷가지들을 챙겼다. 결국 먼저 씻게 된 종대는 귀찮은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와 큰 욕조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 욕실은 타일과 조명의 조합이 꽤 조화로웠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멈추고 목욕을 마친 종대는 가져온 샤워가운을 둘렀다. 문을 빼꼼 열고 주위를 둘러보니 경수는 지쳤는지 아까 그 상태로 침대에 뻗어있었다. 살금살금 침대로 다가간 종대는 경수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경수는 느릿느릿 욕실로 들어갔다.

 

 

경수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종대는 가운 하나만 입고 이미 꿈나라로 향해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종대를 보며 혼자 중얼거리던 경수도 옆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지만 갑자기 창문을 툭툭 치는 소리에 창문 쪽으로 다가가니 캄캄한 어둠 속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가 거슬렸는지 종대는 몸을 뒤척거렸다. 결국 경수는 방 안 창문들을 다 닫은 다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눈을 뜬 종대는 눈앞에 보이는 낯선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바로 어제 한국에 돌아온 종대는 제 집이 아닌 경수의 집으로 향했다. 어제 경수의 집을 둘러본 종대는 저와 경수의 신혼집이 꽤나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침대와 방, 화장실 등 모든 것이 큼직큼직했다. 종대는 제 옆자리가 빈 것을 보곤 시계를 확인했다. 토요일인데도 회사를 가나? 하며 종대는 그대로 다시 누워버렸다.

 

 

종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오후 2시가 되어서였다. 너무 오래 잔 탓인지 어깨며 허리며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경수와 저의 신혼방은 침대 하나, 화장대, 벽에 붙어있는 티비, 작은 서랍 하나가 전부였다. 지나친 고요함을 깨 보려 종대는 서랍 위 올려진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 티비를 켜자 나오는 것은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었고, 별생각 없이 돌린 채널에는 영화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종대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더군다나 제가 좋아하는 스릴러였다. 이거 못 본 건데! 하며 꺄르르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15세 소년이었다.

 

 

신혼여행으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온 경수였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1을 가리키고 있었고 경수는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집 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혹시라도 자고 있을 제 어린 아내 종대가 잠에서 깰까 방의 불은 켜지 않고 거실 불만 킨 경수였다. 종대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 한 경수는 조용히 제 서재에 가방을 놔두고 욕실로 가 씻을 준비를 마쳤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가운 하나 두른 경수는 침실로 향했다. 나름 배려랍시고 불은 켜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갈아입으려 한 옷은 살포시 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경수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향했고 옷을 집어 들었다. 옷을 다 입은 경수는 그제야 침대 위로 올라갈 수 있었고, 이불도 다 차버린 채 정신없이 자고 있는 종대를 위해 이불까지 덮어 준 경수는 종대를 보며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어른인 척해도, 애는 애야.

 

 

경수는 침대 옆 서랍에 위치한 종대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스탠드를 켰다. 남은 업무를 정리하려 서류와 안경을 집어 든 경수는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최대한 나지 않게 하려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새근새근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종대의 얼굴과 그에 살짝 비치는 노란 조명이 잘 어울렸다. 노란색, 스탠드의 불빛은 노란색이었다. 제 스스로도 깨닫고 놀라 경수는 안경을 고쳐 썼다. 혹시라도 잘못 본 건 아닐까, 하며 조마조마 해했다. 종대를 만난 후 생긴 가장 큰 변화였다. 흑백의 세상에서 완전히 탈출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세상에도 드디어 색色이 채워지게 된 것이다. 차마 종대가 깰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기뻐한 경수였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기업끼리의 사이를 유지하기 위한 사교 파티가 열렸다. 피곤한 표정으로 옷을 꺼내 입는 경수에게 언제 깬 건지 제 뒤를 쪼르르 따라온 종대가 있었다. 파티는 뭐 이리 일찍 여는 건지, 아직 깜깜한 창밖을 확인한 경수는 제 뒤에 서있는 종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어났어요?"

"불 켜져서 깼어요. 어디가요?"

"오늘 파티가 있어요, 딱히 좋은 건 아니고. 꼭 가야 되는 거예요."

 

 

종대는 우물쭈물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경수는 그런 종대를 놓치지 않고 종대의 입에서 말이 나올 때까지 종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몇 초 정도를 머뭇거린 종대는 저도 데려가면 안 돼요? 하며 경수에게 의사를 물었다. 그런 종대로 인해 경수는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기업끼리의 사교 파티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저를 조르는 숨 막히고 답답한 공간. 온갖 비싼 음식들과 소품들로 꾸며져 있는 공간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아무리 제 어린 아내에게 감정이 없다고 해도 종대에게 피해가 간다거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돈다면? 경수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일 월요일이잖아요, 오늘은 푹 쉬어요."

"... 다음에는 나도 데려가 줘요."

"우리는 이런 거 말고 더 좋은 데 가요. 빨리 다녀올게요."

 

 

넥타이까지 매고 외출 준비를 마친 경수는 종대에게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간 경수는 익숙하게 제 차를 찾아 문을 열었다. 조수석엔 여행을 다녀온 후 놔두고 온 듯한 작은 오리 열쇠고리 같은게 자리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종대의 것이라고 생각한 경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시계를 확인하곤 바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차의 시동을 건 경수는 신경질적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도로에는 차 한대 보이지 않았다. 제 뒤에 달려오는 차 한대를 제외하곤 도로 위엔 경수뿐이었다. 인상을 풀지 않고 계속 찌푸리고 있던 경수는 뻥 뚫린 도로 덕분인지 살짝 인상을 풀었다. 경수는 이대로 파티장에 갔다가는 정말이지 숨이 막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수는 아무도 없는 도로 위를 쌩쌩 달렸다. 드라이브라도 좀 하면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그것도 얼마 안가 또다시 경수는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경수는 정말 몰랐다. 자신을 답답하게 만드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파티장에 도착한 경수는 조용히 구석으로 향했다. 중앙, 구석 가리지 않고 과도하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파티장을 보고 있자니 경수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담배를 태우는 냄새나 향수 냄새 같은 것이 섞여 경수를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만이 굴뚝같은 경수에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와인까지도 그저 검은색 액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을 걸면 대충 대답을 해주고 고개만 끄덕이다가 경수는 가까스로 파티장에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이 흘렀는지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경수는 곧장 제 차에 올라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린 종대가 걱정된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대폰에는 종대에게서 아무 연락도 와있지 않았다. 재빨리 차에 올라탄 경수는 제 집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차를 빠르게 몬 탓인지 집에는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다. 작은 시곗바늘은 이제 막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완 다르게 곳곳에 불이 켜져 있는 듯했다. 경수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종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재밌었어요?"

 

 

종대의 물음에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경수가 종대에게 밥은 먹었어요?라고 묻기도 전에 종대에게서 배가 고픈데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먹을 게 없어요?"

"네. 저 너무 배고파요."

"미안해요, 내가 요즘 바빠서 냉장고에 먹을 걸 안 채워놨나 봐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청소 같은 건 아주머니가 와서 해주신다만, 요리는 꼭 경수 제가 하겠다는 고집으로 냉장고를 채우는 것 역시 경수의 몫이었다.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경수로 인해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는 것은 당연했다. 경수는 종대에게 사과하며 간단하게라도 뭐 해줄까요, 아니면 뭐 시켜줄까요,하며 물었고 종대는 그냥 괜찮다며 답했다. 미안해 하는 경수를 보며 종대는 경수에게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아까 하늘 봤어요."

"하늘이요?"

"네. 봤는데, 제가 저번에 말했잖아요. 바다가 하늘 때문에 파란색이라구... 근데 오늘 하늘색을 봤어요. 말 그대로 하늘색. 구름이랑 하늘이랑 같이 이렇게 있는 거."

 

 

종대의 말을 들은 경수는 어젯밤 제가 본 게 환상이 아님을 확신했다. 어제 자기 전에, 종대씨 잠든 거 확인하고 스탠드를 잠깐 켰는데, 저도 봤어요. 전 노란색 봤어요. 불빛이 노란색이었거든요. 어제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제가 잘못 본 건 줄 알았는데. 경수도 구구절절 어제 자신이 봤던 색色에 대해 털어놨다. 종대는 그런 경수의 이야기를 듣더니 정말이냐며 아주 기뻐했다. 경수는 종대를 보며 활짝 웃었고 종대도 경수를 향해 활짝 웃었다.

 

 

*

 

 

어느 순간부터 경수와 종대에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흑과 백만이 조화를 이뤘던 그들의 세상에는 조금씩 색이 피어나기 시작한 거다. 서로가 감정을 공유하여 그게 조화를 이루듯 조그만 틈 사이로 빼꼼 자란 푸른 새싹, 푸른 하늘이 색이 입혀져 그들의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나만 이런 거 아니죠? 경수가 조심스레 묻자 종대는 대답 대신 살짝 경수의 손을 잡았다.

 

-저기 분홍색 꽃 보이죠. 앞으로 우리의 세상도 분홍색일 거예요. 운명 이런 거, 사실 저 안 믿었거든요. 종대씨 만나기 전엔 이러지 않았어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우리도 턱시도 입고 신랑 입장하는 그거 할까요?

 

 

종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이 그들을 축복해주는 듯했다. 그 누구보다 종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 자신하는 경수였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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