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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네임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 네임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으며 기질적 성향과는 분리된 개념으로 남녀의 구분과 같은 범주로 분류된다.

… 보통 청소년기에 2차 성징과 함께 신체 특정 부위에 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구에 의하면 유아기 시절에 발현하는 오차 범주 사례도 드물게 존재하지만 성인기에 발현되는 사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네임의 발현은 부위에 통증을 동반한다. 통증의 정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네임의 상대를 만났을 때 통증과 이상증상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또한 개인마다 차이가 존재하며…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네임의 발현 원인과 특성에 관해서는 연구과정 중에 있다.’

 

 

 

민석은 제 뒤에서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한숨을 내쉬었다. 스케줄 표를 받아봤을 때부터 이런 반응을 예상하긴 했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할 일은 다했고 이제 나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러니까 난 모른다. 하나도 안 보인다.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저만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려했으나,

 

 

“혀엉...”

 

 

울 듯 서럽게 부르는 형 소리에 저도 모르게 돌아보고 말았다. 심지어 다시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도 없었다. 품안에 끌어안은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서는 눈만 빠끔히 내밀고 보고 있는 종대라니. 이거는 이길 수가 없어.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스텝들 모두 기본적으로 종대에게 약했지만 특히 매니저인 민석은 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혜인이 죽는다는 소리를 해도 거절했어야 했는데 이리저리 치이는 막내 코디가 안쓰럽다고 대신 올라온 제 죄였다.

 

반쯤 돌아간 고개를 다시 돌려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종대가 다시 민석을 불렀고,

 

 

“민석이 혀엉...”

 

 

민석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머뭇거리던 고개가 온전히 종대를 향해 돌아섰다. 억울하고 서운할 때마다 짓는 저 표정 앞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해. 이러니까 나 보내지 말라고 했잖아. 제 손을 굳게 잡고 이번 스케줄은 절대로 못 무르니까 설득하라던 준면의 얼굴이 떠올라서 한숨은 깊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무슨 말인지 대강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80퍼센트 정도 짐작되는 바가 있긴 했지만 확인사살인지 헛다리짚은 건지는 종대가 말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니까.

 

 

“형, 나 그 토크쇼 안 나가면 안 돼?”

 

 

역시나. 80퍼센트에 꽉 맞는 대답에 민석은 머리를 짚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20퍼센트에 걸었건만 종대는 머뭇거리면서도 확실하게 민석을 정조준 했다. 그래, 솔직히 99퍼센트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이토록 정확한 확인사살이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전이라면 민석도 너 싫다면 말자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서줄 수가 없었다.

 

 

“첸 설득해. 이번 절대 스케줄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못 물러. 박 피디한테 우리가 실수한 것도 있어서 이번에 파토내면 대형사고야. 김 매니저만 믿을게.”

 

 

그런 대형사고 안 칠거지, 김 매니저?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반 협박수준이라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신뢰도 높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 믿음을 배신이라도 한다면 선하고 사람 좋은 얼굴이 야차같이 바뀔 게 분명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민석에게 설득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토크쇼 나가기 싫어?”

“응... 안 나가고 싶어.”

“종대야, 이쪽 일하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게 힘들다는 거 알잖아.”

 

 

단호한 제 말에 그건 그렇지만, 하며 웅얼거리는 종대를 보며 민석은 속으로 빌었다. 제발 이렇게 설득당해 주기를. 하지만 종대는 역시 쉽지가 않았다.

 

 

“이번 한번만... 안 돼?”

 

 

손가락 하나를 펴며 한번만 하는 종대에 장난감 코너에서 떼를 쓰는 아이가 떠올랐다. 장난감을 부여잡고 한번만, 이것만하며 매달리는 아이랑 별 다를 게 없었다. 저번에도 똑같은 말을 했으면서 습자지처럼 얕은 거짓말이라니. 이번만이 아니니까 그렇지. 너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면서 스케줄 깠거든? 속아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고불고 할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엉엉 울게 놔둘 수도 그렇다고 속아 넘어가 줄 수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지. 명쾌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제 눈치만 살피고 있는 종대는 한숨만 나오고. 민석은 결국 목을 가다듬었다. 명쾌한 답이 없을 때 택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직구.

 

 

“종대야, 너 토크쇼 나가기 싫은 게 경수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라.”

 

 

민석이 날린 꽉 찬 직구에 종대가 몸을 움츠렸다. 품안의 쿠션이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급된 이름만으로도 불편한 데 토크쇼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좀 전보다 더 억울한 표정이 된 종대가 주춤거리면서도 제 의견을 피력했다.

 

 

“왜 하지 마..? 도경수 때문 맞는데?”

 

 

맞을 걸 알고 한 얘기지만 또 저렇게 순순히 인정을 해버리면 얄미울 수밖에 없지. 민석이 종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종대 네가 하도 이러니까 말하는 건데.”

 

 

운을 떼며 종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바로 앉아봐. 쿠션을 품안가득 안고 웅크려있던 종대가 꾸무럭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앞에 앉는 민석의 눈이 단호했다.

 

 

“탁 까놓고 말해보자. 너희 둘이 싸우기를 했어, 아니면 경수가 너를 인터뷰마다 돌려 까기를 했어? 네 이름 나오면 매번 칭찬하는 데 뭐가 그렇게 불편해서 그러는 데.”

“형 그거는...!”

“형 말하는 거 끝까지 들어. 그리고 이전 경수 드라마 ost 중에서 네 음원이 제일 순위 높았던 거 알지? 아직도 차트 상위권에 있고. 네 노래 잘 뽑힌 것도 뽑힌 건데 경수 걔가 드라마얘기만 하면 네 얘기해서 그런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너희 같은 소속사야. 탑 배우 도경수에 남자 솔로가수 중에 독보적인 첸이 같은 소속사에 동갑내기라네?”

“...근데 왜 도경수만 탑이라고 해, 형은...?”

 

 

입을 오리처럼 삐죽 내밀고 웅얼거리는 종대에 민석이 피식 웃었다. 이 심각한 와중에도 그런 걸 짚어내는 종대가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래, 형이 잘못했네. 너도 탑 가수야. 됐지?”

 

 

애 달래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기하자 귀가 금세 발갛게 달아오른다. 막상 칭찬을 해주면 쑥스러워 못 견뎌할 거면서. 연예계 자체가 말로 못하면 자막으로도 낯 뜨거운 칭찬 깔아주는 곳이었고, 그런 연예계 생활을 하루 이틀 겪다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 매번 민망해하는 종대 같은 사람은 드물었다.

 

솔직히 맘먹고 종대를 칭찬하려 들면 탑 가수정도는 우스웠다. 음원만 내면 차트 올킬에 안무를 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라이브, 소위 말하는 CD 삼킨 라이브를 탑 하나로 설명하긴 좀 아까운 일이었다. 제가 맡고 있는 가수라서가 아니라 정말. 하지만 더 말하면 종대의 귀에 불이 붙을 것 같아서 거기까지만 말하기로 했다. 응, 됐어 하며 배시시 웃는 종대의 뺨을 쓸어주곤 손을 내렸다.

 

 

“어쨌든 연예계에서 안 엮이려야 안 엮일 수 있는 조합이야, 너희가?”

 

 

이런 조합을 피해가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는 말에 종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양 뺨에서 웃음기가 쏙 빠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민석의 말이 다 맞았다. 연예계 관계자 뿐 아니라 팬들마저도 쌍수를 들고 둘의 조합을 반겼고 지금까지 둘이 엮여서 잘되지 않은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소위 말해 돈이 되는 그림이었다. 한번 뿐이었던 동반 화보조차도 어마어마한 판매부수를 기록했었고 경수가 영화나 드라마를 들어가면 으레 종대에게 ost 요청이 들어왔다.

 

그뿐 아니라 같은 회사에 소속된 동료 연예인으로써 도경수는 정말 완벽했다. 인터뷰 때 종대의 이름이 회자될 때마다 과하지 않은 칭찬으로 비 활동기에도 검색어 창에 오르내리게 해주었고 활동기에 노래가 나오면 언급을 포함한 홍보도 적절하게 해줬다. 심지어 평소 인색한 업로드로 인해 봇이 운영하는 게 아니냐, 봇마저도 잊어버린 계정이 아니냐는 하는 sns에 신곡 음원이 풀리는 시간에 맞춰 음원이 돌아가고 있는 화면을 게시했다. #chen 덜렁 하나뿐이긴 해도 해시태그까지 빼놓지 않고 붙이는 정성이 대단하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료로써의 도경수고, 사람 도경수는 확실히 달랐다.

 

 

“아뇨, 우리가 따로 연락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지. 연락처를 거절당하던 날카로운 순간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연락처만 거절당했나, 다른 건 더 많았다. 자신이 피하고 싶은 사람 1위에 도경수를 꼽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생각하니까 그때 입었던 마음의 상처가 쿡쿡 쑤셨다. 바른 자세를 잡고 있던 몸이 불을 가까이한 페트병처럼 쭈그러들었다.

 

 

“그래도 싫은걸.”

 

 

싫은 걸 어떡해, 하는 종대에 민석이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경수가 잘못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종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분명 어디에 제가 놓친 이유가 있긴 할 거다. 문제는 그걸 어디서 놓쳤는지 조차도 감이 오지 않는 데 있었고. 당사자도 얘기를 꺼내지 않으니 알 턱이 있나. 저라고 종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싶어 이럴까. 그냥 싫어 같이 두루뭉술한 이유로는 준면의 앞에서 사장님의 믿음을 배신하고 대형사고 쳤습니다, 하고 제 목을 들이밀 수도 없었다. 이 주제로 얘기를 할 때마다 말없이 손을 꼬물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맘만 커졌다.

 

 

“경수가 너한테 뭘 어쨌는데 매번 겹칠 때마다 이래.”

 

 

종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제가 떼쓰는 애처럼 군다는 자각은 있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서 무작정 싫다고만 하는 저 때문에 여러 사람이 답답해 한다는 것도 알았고. 그래도 민석만큼은 아무 말 없이 제 편이 돼주면 좋겠는데 친근하게 경수, 경수 부르는 민석이 야속했다. 형은 나야, 도경수야? 유치한 물음을 차마 입으로는 하지 못하고 눈으로만 쏘아대다가 이내 포기하고 시선을 내렸다. 그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걔가 뭘 어쩌진 않았지. 하지만 같이 뭐 찍는 게 죽어도 싫은 걸 어떡해. 종대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형 근데.. 도경수랑 나랑 활동하는 분야도 다른 데 왜 같이 나가? 홍보할 영화도 없을 건데...?”

“말했잖아, 원숭이띠 스타들 특집이라고. 녹화는 2주 뒤로 넉넉해. 그러니까 가서 같이 잘 얘기하고 와.”

 

 

데면데면한 거는 이제 그만 좀 하고. 너희가 본지가 얼만데. 못난 자식 어르는 것 같은 말투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관계가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형성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의 깽판으로 엉망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데면데면하고 떨떠름한 관계의 책임은 분명 도경수 쪽에도 있었다. 고개를 푹 떨군 종대가 입안으로만 웅얼거렸다. 나도 이런 관계 유지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랑은 잘만 친해지면서 왜 그래, 하는 칭찬을 닮은 타박에는 억울함이 두 배가 됐다. 억울함은 왜 내 몫이기만 해, 왜. 1인분은 도경수가 가져가야 되는 건데...! 종대가 주먹을 움켜쥐고 씩씩거렸다.

 

 

“뭐라고?”

“몰라...!”

 

 

귀를 가져다대는 민석을 피해 고개를 팩 돌렸다. 지금은 도경수의 도자만 나와도 예능출연을 고사하지만 처음은 분명 이러지 않았다. 도경수와 짱 친해져서 연예계 절친 탑 쓰리 안에 들고 말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 또 먹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절친 탑 쓰리는 핑계고 경수랑 친해지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종대는 배우 도경수가 FA시장에 나오기 훨씬 전, 경수가 아역일 때부터 팬이었으니까.

 

 

“윤 실장님이 배우 관리 쪽으로 빠지시기로 했어. 이번에 도경수랑 계약하게 돼서 집중케어 필요해. 어쩔 수 없는 거 알지?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경수가 종대 소속사와 계약을 했을 때 종대 스텝들의 이동이 좀 있었다. 남다른 대우에 종대의 맘이 상할까봐 그랬는지 준면까지 직접 나서서 종대를 다독였던 그 때, 종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운해 하기는 무슨. 윤 실장님이 아니라 제 스텝을 다 빼간다고 해도 안 서운했을 거다. 이전 스텝들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경수를 보러갈 수 있을 테니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그만큼 경수가 제 소속사랑 계약을 한다고 했을 때 제일 신이 났던 건 종대였다. 아무한테도 말 안했지만 경수가 계약서에 도장 찍는 날엔 혼자 케이크 사다 초도 불었다. 숫자 초 1을 꼽고 도경수와 한솥밥 오늘부터 1일 그러면서. 그랬는데, 그런 내 팬심을 망친 게 누군데. 다름 아닌 도경수였다. 도경수는 내 꿈과 희망을 짓밟았다고! 최애와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면서도 최애를 화면에만 둬야만 하는 슬픔을 알아, 형이? 튀어나올 것 같은 말들을 삼킨 종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여전히 경수가 좋았다. 도경수는 도경수니까. 사사건건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경수의 스케줄이라면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달달 외는 답도 없는 빠돌이가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팬과 최애가 아닌 동료로 만나야 하는 도경수는 버거웠고,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첸 씨.”

 

 

몇 백번은 더 불린 예명임에도 경수가 부를 때는 견고하고 명백한 선이 느껴졌다. 덕분에 업계 내에서도 둔하다는 소리를 꽤 들었던 종대도 알 수 있었다. 경수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걸.

 

처음에는 겁이 났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수에게 큰 잘못을 한 걸까봐. 미움 받고 싶지 않았기에 경수와 마주했던 시간들을 기억나는 대로 다 헤집어봤다. 제 잘못이라면 사과를 하려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짚이는 게 없었다. 애초에 짚이는 구석이 있을 만큼 접점이 있던 사이도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혹시 저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어 편견이 있는 게 아닐까 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만회해야지 했는데, 그 기회조차 받질 못했다. 돌아온 건 거절의 연속 뿐.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경수는 한결같이 곁을 내주지 않았다. 이렇게 꾸준히 미워하는 것도 정성이 있어야 되는 거라고 위안해보기도 했지만 상처는 쉽게 회복 되질 않는다.

 

최근이 제일 셌지. 최근, 최근이라도 해봤자 거의 4개월 전의 일이지만 어쨌든 우연한 자리에서 경수를 만났다. 만날 수 있는 루트는 다 피하다가 만난 거라 그것도 한 4개월 만이었나. 다른 가수와 배우들, 동료들 사이에서 섞여서 웃으면서도 눈치를 봤다. 둘이 얘기해야 될 일이 생기지 않도록 괜찮은 타이밍에 슬쩍 빠져야지 했는데 빠지질 못했다. 저를 보는 경수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살짝 웃기도 했고.

 

다른 가수들이랑 이야기를 하면서도 신경이 온통 쏠려서 손목이 뜨겁게 펄떡거릴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이제 나 안 싫은가. 이제 나 안 미워하나. 아주 조금 그런 기대를 했던 것도 같은데, 시종일관 입가에 머금고 부드러운 웃음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 빠짐과 동시에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앞으로 엮이지 말죠, 첸 씨랑 저.”

 

 

우리라는 단어로도 엮지 않는 단호한 음성과 제 답은 필요도 없다는 듯 냉정하게 돌아서던 뒷모습. 엮이지 말자는 말이 아직도 이렇게나 쓰라린데 동반 토크쇼 출연이라니. 아무리 카메라 앞이라도 웃으며 말할 자신도 없고 또 그 냉대를 견딜 자신도 없다. 온전히 제 몫일 상처가 벌써부터 화끈거리고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지? 토크쇼 나가는 걸로 안다, 그럼.”

 

 

알겠지? 라니? 아니, 난 모르겠는데...?! 수긍할 수 없음에도 스케줄을 까낼 마땅한 명분이 없어서 머리만 굴리고 있는 데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정리하고 가려는 행동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디 그럴싸한 게 없나. 뭐라도 생각나길 바라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종대가 불현듯 떠오른 실낱같은 명분에 벼락같이 고개를 들었다.

 

 

“형, 그거 원숭이 띠 스타 특집이라고 했지?!”

“..그런데 왜?”

“엄연히 따지면 도경수는 93년 닭띠 스타 아냐?”

 

 

떨떠름한 민석의 표정을 보면서도 종대는 이야기를 다다다 쏟아냈다. 도경수 닭띠야! 아무리 그래도 빠른 년생인데 원숭이띠로 취급하면 안 되지! 원숭이띠 스타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 나부터도 어? 맘이 좀 그래! 꽤 괜찮은 핑계를 찾았다고 생각한 종대의 목소리는 다시 높아졌다. 듣는 민석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고. 누가 보면 김종대가 연예계 원숭이띠를 대표하는 사람인줄 알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석이 종대의 이마에 날카로운 딱밤을 놓았다.

 

 

“아, 아파.”

“좀 아프라고 한 거야. 종대야, 방송국에서 그걸 모르고 너희를 섭외했을까? 아니지. 너희를 엮으려는 수많은 핑계 중에 하나라는 걸 모르는 거야, 아님 알면서도 이러는 거야.”

 

 

눈을 굴리는 걸 보니 아마도 후자였던 것 같아서 민석은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2주 뒤 토크쇼가 있다는 말을 재차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메이크업 중에도 끊어지지 않는 종대의 한숨에 은수가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뒤에 선 민석이 요 며칠 상태가 안 좋으니 좀 봐달라고 눈짓을 했지만 이대로 둔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김종대, 너 오늘 화보 죽 쑤고 싶어? 표정도 메이크업의 일부인거 몰라? 자꾸 줄 한숨을 쉬면 어쩌자는 거야.”

“아... 미안해요, 누나.”

 

 

기가 죽은 종대가 입술을 꾹 무는 걸 보는 은수도 맘이 편하진 않았다. 맥 빠져 있는 종대가 맘에 안 들어서 한 소리 하긴 했어도 저도 종대를 아끼는 스텝 중 한명이었으니까.

 

 

“미안하면 표정 좀 펴. 눈썹도 가만히 두고.”

 

 

고개를 끄덕인 종대가 표정을 바로 하고 거울을 응시했다. 억지로라도 거울 속에 집중하면 생각이 좀 덜 날까 싶어서.

 

요즘 종대의 머릿속은 도경수와 토크쇼로 가득했다. 예능에 나오는 아프지 마, 도토 소리에도 ‘도’경수와 ‘토’크쇼가 생각나서 흠칫할 정도였으니 그 증세가 심각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손목도 계속 아프고. 며칠 전부터 저릿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오른쪽 손목을 꾹꾹 주물렀다.

 

민석이 통보를 하고 떠날 때만 해도 2주가 이렇게 금방 돌아올 줄은 몰랐다. 촬영날짜가 다가올수록 한숨이 늘어서 고작 하루 남은 지금은 거의 말 반, 한숨 반이었다. 엮이지 말자던 건 경수였으니 그 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잠시 하기도 했었는데 헛되다는 걸 깨닫는 것도 금방이었다. 애초에 소속사가 취소 안 된다고 강조한 스케줄이었다. 같은 소속사인데 경수라고 다른 방침이었을 리 없고. 결국 하잖아, 토크쇼.

 

 

“엮이지 말자고 했을 텐데요.”

 

 

제가 잡은 스케줄도 아닌데 제게만 쏟아질 경수의 냉대를 생각하니 어깨가 저도 모르게 가라앉았다. 또 한 번 한숨을 뱉을 뻔 한 종대는 거울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번뜩이는 은수의 눈빛에 겨우 입을 다물었다. 스케줄도 맘대로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한숨도 제대로 못 내쉰다니. 소소한 불만을 삐죽임으로 표출하기 무섭게 은수가 한 소리를 보탰다.

 

 

“입 삐죽거리지 마. 립 발라놓은 거 지금 네가 다 먹고 있는 건 알아?”

“조은수, 종대 그만 구박해.”

“구박하는 거 아니고 조언이거든.”

“조언 같은 구박이지. 애 기 죽이지 마.”

“네가 뭘 모르나본데 나는 기 살려주려고 이러는 거다? 이번 화보에 우리 종대가 힘 있게 딱 실려 줘야 된다고!”

 

 

종대를 사이에 둔 은수와 민석이 투닥거리는 모습은 언제나처럼 가벼웠다. 실제로 분장실의 모두가 즐겁게 웃고 있었고. 밝게 웃지 못하고 바스락거리는 건 종대 하나였다. 좀처럼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토크쇼를 생각해서 그런가. 어색한 웃음을 내려놓고 손목만 매만지는데, 욱신거리기만 했던 손목 안쪽이 삽시간에 뜨거워 졌다.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다. 열기가 서서히 올라오는 수준 정도가 아니라 검게 치솟은 불길이 떨어진 것처럼 온통 이글거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아픔에 종대가 손목을 쥐고 몸을 웅크렸다.

 

 

“뭐..뭐야? 왜 그래, 갑자기?”

“종대야? 어디 불편해?”

“어디 아파?”

 

 

스텝들의 목소리는 높은 이명으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팔찌하나도 하지 않은 맨 손목은 실금한번 간 적 없었건만 이유모를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분명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손목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누군가 제 손목을 불로 지지고 칼로 그어대는 것 같았으며 통증은 점차 더 강렬해졌다. 비명을 삼키는 게 지금 종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읏...!”

 

 

눈앞이 일그러졌다.

 

 

 

 

 

걱정 어린 눈길들이 화보촬영 의상을 준비하고 있는 종대에게 닿았다. 눈을 접어 웃으며 안심시키려 노력해도 시선들은 오래도록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중 제일 심각한 눈으로 종대를 보고 있는 건 아무래도 민석이었다. 심각한 스텝들을 향해 더 맑게 웃는 걸 보고 있으니 맘이 쓰렸다.

 

 

“저렇게 웃는 게 더 불안하다고.”

 

 

민석이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종대가 나 괜찮아요, 하는 얼굴로 웃은 때 치고 괜찮았던 때가 없었다. 큰 두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연말 무대에서 스테이지에 남아있던 물기에 미끄러져 넘어졌던 거고, 다른 하나는 뮤직비디오 촬영에서 장시간 물을 맞았던 일이다. 그 당시에도 종대는 딱 저 얼굴로 주변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결과는 둘 다 병원신세. 전자는 발목이 퉁퉁 부어서, 후자는 고열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야 했고 민석이 안심을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어시가 잠시 멀어진 사이에 민석이 종대 곁으로 다가섰다.

 

 

“너 정말 괜찮겠어?”

“응, 정말 괜찮아.”

 

 

민석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종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원인 불명의 통증은 확실히 이례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물론 통증의 잔상으로 뻐근하고 화끈거리는 감각은 남아있었지만 아까에 비하면 버틸 만 한 수준이었고. 펴지지 않는 미간에 종대가 손목을 돌려가며 어필했다.

 

 

“진짜 괜찮다니까.”

“종대 너...”

“저, 매니저님 이제 촬영 들어갈게요.”

 

 

스텝의 등장에 민석이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아마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민석은 ‘솔직히 말해’로 시작해서 언제부터 아팠던 거냐, 아픈데 왜 말을 안했냐 하면서 화 아닌 화를 냈을 게 뻔했다. 그러니 화를 피할 길을 내어준 그녀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가슴을 쓸어내린 종대가 고마움을 담은 눈인사를 건네며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카메라 앞의 종대는 풍부한 표정으로 요구하지 않는 포즈도 곧잘 해냈다. 아무나 화보킹 소리를 듣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다양한 포즈에 작가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잘 진행이 되는 듯 했는데, 촬영을 잠시 멈추고 모니터를 하던 작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어딘가 걸리는 구석이 있는 지 자리를 옮겨가며 사진을 보는 모습에 이어갈 촬영을 준비하던 스텝들의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뭔 일 있나? 관심이 자연히 그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방점은 작가가 종대를 부르면서 찍었다.

 

 

“첸씨, 와서 이것 좀...”

 

 

원체 촬영 중간에 부르는 법이 없는 작가였기에 스텝은 물론이고 종대의 고개도 옆으로 기울었다. 뭐가 잘 안 됐나. B컷이 너무 많나. 촬영 중에 느낌이 좋아도 모니터로 보면 별로인 경우도 있었으니 그리 말이 안 되는 예측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부르진 않는데. 덕분에 뜨거운 조명 아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확실히 찝찝하긴 했다.

 

 

“무슨 일이세요?”

 

 

모니터 쪽으로 다가선 종대가 손목을 매만졌다. 아파서가 아니라 정말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모니터와 종대를 번갈아 보던 작가의 눈이 종대의 손목에 스쳤다.

 

 

“별 일은 아니고, 첸 씨가 문신을 했었나...?”

“문신이요? 에이, 작가님 저 문신 안 해요. 몸에 상처내고 그런 거 무서워서.”

 

 

아시잖아요. 살갑게 웃는 종대를 보며 작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지, 알고 있었는데... 흐려지는 말끝에는 불편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의아해졌다. 진짜 왜 이러시지, 오늘따라. 덜어지지 않는 찜찜함에 종대가 웃음을 거뒀다.

 

 

“그럼 혹시... 네임이야?”

 

 

숨을 죽이고 있던 스텝들 탓에 스튜디오에 물음이 크게 번졌고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듣는 상대에 따라 충분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사회에서 네임이라는 것 자체를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종대가 듣기에도 편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뒤에 지켜보던 민석의 어깨가 들썩하는 걸 발견해 버려서 한 발 먼저 대꾸했다.

 

 

“아뇨, 아니에요.”

“그래...?”

 

 

작가는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모니터와 종대를 번갈아 봤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미심쩍은 물음들과 분명히 대답을 했음에도 돌아오는 미적지근한 반응에 종대가 미간을 좁혔다. 제가 참으면 되는 일이니까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이대로는 뒤에 남은 촬영을 좋게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작가님 아까부터 자꾸...”

 

 

자꾸 왜 그러시냐고 답답함을 채 다 털어놓기도 전에 손가락 끝이 모니터 속의 종대를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면 종대의 손목을.

 

 

“그럼 이건 뭐가 잘못 묻은 건가?”

“...어? 이거 뭐예요?”

“그치? 첸 씨가 봐도 좀 이상해보이지? 나 렌즈 좀 확인하고 올게.”

 

 

렌즈를 확인하겠다고 가는 뒷모습에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끄덕인 종대가 허리를 숙여 모니터를 응시했다. 사진을 보니 작가가 왜 자꾸 불편하게 물었는지 이해가 됐다. 스치듯 훑어보면 모를 사진이었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오른손목 안쪽에 얼룩이 보였다. 잉크가 번진 것처럼 검은 얼룩이.

 

 

“뭐지, 이게...?”

 

 

사진이 깨져서 번져 보이는 건가. 눈을 찌푸리고 봐도 저런 사진이 나온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눈을 비비려다 메이크업을 생각해서 다시 손을 내린 종대가 천천히 화면을 넘겼다. 한 장씩 넘기며 확인하던 종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사진을 훑는 손은 빠르고 다급해졌다.

 

 

“보니까 렌즈는 괜찮은데...”

 

 

렌즈이상을 확인하러 갔던 작가가 중얼거리며 다시 종대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척에 종대는 제 오른손목을 꽉 움켜쥐어 가렸다. 저릿했다.

 

 

“문신 같은 것도 아니고 렌즈 문제도 아니면 이 사진은 뭐지?”

“...”

“좀 이상하긴 한데, 신경 쓰지 마, 첸 씨.”

 

 

보정하면 지우는 건 일도 아니니까. 굳어있는 종대가 맘에 걸렸는지 뒤늦은 위로가 돌아왔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고 상황을 정리한 작가가 다시 촬영해보자 말할 때도 종대는 손목만 쥔 채 서있기만 했다.

 

손에 피가 잘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감싼 탓에 왼손이 파르르 떨렸다.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는 이 아래에는 손가락이 조금만 벌어져도 모두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진하고 선명한 얼룩이 있었다.

 

어느새 또렷한 이름의 형태를 갖춰가며.

 

 

 

 

 

촬영은 취소가 됐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종대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해야 하는 일들이 가득 쌓여 민석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분명 종대 탓도 아닌데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복잡했다.

 

조금 전, 촬영을 한다는 말에도 홀로 섬처럼 서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해서 다가섰던 민석에게 종대는 떨면서 손목을 내밀었다.

 

 

“형, 나 손목에...”

“왜? 또 아파? 병원으로 갈까?”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젓는 데 눈이 젖어있어 덜컥했다. 아픈 게 아니면 원인은 하나였다. 저 작가가 뭐라고 했기에. 날선 민석의 눈이 작가를 향했다. 그쪽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으나 그런 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떠는 종대를 마주한 순간부터 다음부터 이 작가랑 화보는 절대 안 잡기로 결심했으니까. 모니터랑 종대를 번갈아 살펴보는 행동도, 네임이냐는 물음도 한 마디 할까 하다 겨우 참았는데 애를 이 지경으로 몰아붙이다니.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첫 무대 때도 안 떨던 종대가 이렇게 까지 떨고 있다는 건 빤했다. 이전에 같이 작업을 잘 해왔건 말건 무조건 아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석은 마무리되는 대로 소속사를 통해 앞으로의 작업은 없다고 확실히 못을 박을 작정이었다. 작가 쪽에서 미안한 소리를 한다고 해도 결정을 번복할 생각도 없었다.

 

떠는 종대의 등을 다독이며 구석으로 이끌었다.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압박을 넣을 수 있을 테니 먼저 이야기를 좀 하려던 거였다. 하지만 구석에 도착한 종대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다시 손목을 내밀었다.

 

 

“...형, 이거 갑자기... 어떡해...?”

 

 

이번에는 가리지 않은 손목을. 앞으로 내밀어진 손목을 내려다 본 민석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하얀 손목에서는 검게 글자들이 일렁거리고 있었고, 판단은 빨리 내려졌다. 미안한 소리는 지금 당장 촬영을 끝내야 되는 우리 쪽에서 해야 하는 거였네. 심각한 얼굴로 종대의 손목을 내려다보던 민석이 반대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혜인을 불렀다. 막내야. 바짝 긴장하고 있던 혜인이 금세 둘 곁으로 다가왔다.

 

 

“앞에 편의점이든 약국이든 가서, 밴드 사와.”

“밴드요? 어떤 걸로 사올까요?”

“손목 다 가릴 만큼 큰 걸로.”

 

 

민석은 손으로 종대의 손목을 덮어 가렸다.

 

 

 

 

 

“우선 당장 언론에 알려지는 일 없게 소속사 측에서 관리할거야. 그리고 내일 스케줄은 취소 해달라고 할게. 그니까 너는 맘 편히 먹고 집에서 쉬고 있어.”

 

 

민석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쉴 수 있을 리가. 선뜻 제 속을 갉아먹던 토크쇼도 취소해달라고 한다는 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비하면 그건 아주 사소했다. 불안한 걸음이 온 집안을 오갔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네임으로 발현을 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네임의 이름도 하필.. 확인하나마나 동명이인이겠지만 그게 더 기가 막혔다. 말이 되는 일이야, 이게? 처음 발견하고 느꼈던 동요는 점차 가라앉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소파에 무너지듯 앉은 종대가 다시 태블릿을 켰다. 화면에 빼곡한 글씨들은 네임과 관련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중 제일 꽂히는 글귀는 이거였다.

 

 

‘성인기에 발현되는 사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성인기에 발현이 되지 않는 까닭은 성인기는 제 짝을 만났을 가능성이 이전의 시기들보다 커서 각자의 짝이 있는 상태에서 운명적으로 끌리는 네임이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게 연구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네임이 가지고 있는 운명의 끌림을 감안해서 충분히 설득적이었을 뿐 아니라 뒤집을만한 사례가 없었다. 그런데 그 정설을 무너뜨리는 게 바로 나라니. 성인기 발현. 내가 바로 그 첫 사례라니. 어디 연구실이나 실험실에 끌려가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보통 청소년기에 2차 성징과 함께 신체 특정 부위에 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2차 성징 발현이 일반적이라뇨. 내 2차 성징은 까마득한 옛날이라고요... 태블릿에 얼굴을 박고 끙끙 앓았다. 10년도 더 됐는데, 갑자기 발현이라니. 읽을수록 제 상황이 비 일반적이라는 것만 명확해져서 한숨이 나왔다. 네임이 발현을 하고 나니 며칠 전부터 아프던 손목과 오늘 갑자기 심해졌던 통증도 전부 설명이 됐다.

 

 

‘네임의 발현은 부위에 통증을 동반한다. 통증의 정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이유를 알 수 없던 통증은 발현통이었고 이건 정말, 네임이 맞고. 슬쩍 눈을 돌려서 손목을 내려다 본 종대가 길게 붙어있는 데일밴드에 못 볼 것을 본 양 고개를 돌렸다. 왜. 왜 하필. 손목에 데일밴드를 붙여 가렸지만 화끈거리는 네임은 제 존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문제는 앞으로였다.

 

연예계에서 네임을 공개하고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연예계에도 네임이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니까. 특이한 케이스로 네임 상대를 공개하고 공개연애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업계 특성상 개인의 네임이 밝혀질 경우 스캔들 기사가 되고 뒤의 캐스팅자체에 영향을 받다보니 굳이 나서서 밝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누가 네임이네, 아니네 하면서 뒤에서 이야기가 돌더라도 네임이 희귀한 것도 아니었고 네임보호법의 벌금과 형량이 가볍지 않기 때문에 무모하게 취재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근데 지금 상황은 좀 달랐다.

 

 

‘최초 성인기 네임 발현’

 

 

벌금을 물더라도 한 번 뛰어들만한 소재였다. 알려지기만 하면 이목이 집중될 테고 갑자기 발현한 이유가 뭔지 아냐고 묻겠지. 그걸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저도 모르는 들이밀어지는 마이크와 카메라는 생각 만해도 울렁거렸다. 게다가, 네임 상대까지 거론되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었다. 진짜 대형사고지.

 

소파 구석에서 몸을 말고 무거운 숨만 푹푹 쉬는데, 전화가 울렸다. 힘없이 받은 전화에 뭐라 대꾸하기도 전, 상대방의 목소리가 급하게 치고 나왔다.

 

 

[종대야, 너 이 시간 이후로 핸드폰 끄고 절대 밖에 나오지 마.]

 

 

너 네임 발현된 거, 유출됐어.

 

 

 

 

 

종대의 네임 관련 기사가 터지기 전에 소속사는 보도 자료를 돌릴 예정이었다. 네임을 가린다고 해도 손목이라는 위치특성상 계속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장 오늘 화보촬영을 접은 게 논란이 될 테니 선수를 쳐야 했다. 최초 성인기에 발현된 네임이라는 화제성은 그대로 이용하면서 취재가 과열되지 않도록 네임 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한 보도 자료가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후속 보도까지 전부. 촬영 스텝이 사진과 함께 인터넷에 올린 글만 아니었다면 예정대로 진행이 됐을 거고 지금처럼 포털이 엉망이 되진 않았을 터였다.

 

 

제목 : 첸 네임 아닌 거 맞아?

익명

 

오늘 첸 화보촬영 뛴 스텝인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글 올리는 거야

첸 네임 아닌 거 맞아?

나도 지금까지는 아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저 손목 안쪽에 보이는 거 네임 아냐?

오늘 촬영도 중단하고 갔는데,

그것도 이거 때문인 것 같아.

근데 성인기에 발현하기도 하나?

 

 

밑으로 수백 개의 댓글들이 달린 건 당연한 결과였다. 사진 유출한 스텝에 대한 비난과 함께 네임이다, 아니다 뿐 아니라 발현 가능, 불가능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첸 네임’ 검색어는 단박에 실시간 검색 1위에 올랐다. 당장 소속사로도 사실 확인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고. 상황이 이렇게 된 만큼 대응 매뉴얼이 나오기 전에 종대가 움직이는 건 금물이었다.

 

 

[밖에 나가지 말고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

 

 

알았다 답하고 전화를 끊은 종대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제일 안 좋은 방법으로 알려졌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진에서 이름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 다는 거였다. 이름까지 알려졌으면 사태는 보다 심각했으리라. 밴드에 감춰진 이름을 손으로 다시 덮었다.

 

 

‘띵동’

 

 

갑작스럽게 울리는 벨에 종대가 움찔했다. 벌써 기자들이 몰려왔나? 아니, 기자라면 이렇게 얌전할 리가 없는데. 숨을 죽이고 멈춰있는 데 이번에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귀를 꾹 틀어막고 없는 척 하려 했지만 벨에서 노크로, 노크에서 벨로 순환하며 종대를 부르는 방문객은 누군지 몰라도 끈질기고 꾸준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누가 이러는 지 잠시 화면으로 보기만 하고 올 셈이었다.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바로 경비실을 호출할 준비도 했다. 발뒤꿈치를 들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섰다. 누군지 정말 조용히 확인만 하려고 했는데, 문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종대가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아챈 것처럼.

 

 

“김종대.”

 

 

선명하게 들리는 제 이름에 화면 보기를 누르려던 손이 허공에서 덜컹거렸다. 아는 목소리였다. 문이 있다지만 문을 사이에 두고 들어도 구분이 안 될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니 제 귀가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 여기 올 사람이 아니니까. 속으로 설마, 설마 하며 버튼을 눌렀을 때 보이는 얼굴에 종대는 헛숨을 삼켰다. 제가 볼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한 듯 상대는 빤한 시선으로 인터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열어.”

 

 

단정한 음성이 뒷걸음질을 치던 종대를 잡아챘다.

 

 

“안에 있는 거 알고 왔으니까. 문 열어, 얼른.”

 

 

도경수가 여길 왜 와. 아니, 여길 어떻게 알고 와? 손목 안쪽이 다시 욱신거렸다.

 

 

 

 

 

“잠깐만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려는 걸 저지한 종대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경수를 살폈다. 단호함에 홀려서 얼결에 문을 열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제 발현만큼이나 이상한 거였다. 도경수가 여길 올 이유가 뭐야. 욱신거리는 손목을 뒤로 감췄다.

 

 

“도경수 씨 맞아요?”

 

 

첫 물음에 경수가 피식 웃었다. 입모양이 하트가 아닌 찌그러진 타원인 걸 보면 저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종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럼 내가 도경수가 아니면 누구겠어.”

 

 

종대가 입술을 꾹 물었다. 몰라서 물은 거 아니거든. 나도 너처럼 생겨서 너 같은 목소리 내는 게 너 하나뿐인 건 알거든. 그걸 알았으니까 좋아했지. 이 와중에도 속에서 울컥거리는 팬심을 갈무리한 종대가 신발을 벗으려는 경수를 다시 말렸다. 잠깐만요. 이번에도 신발을 벗지 못한 경수가 못마땅한 듯 눈을 찡그렸다. 지지 않으려 종대도 눈에 힘을 줬다.

 

 

“도경수 씨가 맞으면 이상하니까 물어본 거예요. 도경수 씨가 내 집에 올 이유가 없잖아요?”

“너 네임 발현했잖아.”

 

 

내 네임 발현? 그게 엮이지 말자고 가버리던 도경수가 여기 올 이유가 된다고? 꾸물거리며 고개를 드는 생각에 종대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손목에서 맥박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그게 뭐요?”

“그 ‘네임’에 관해서 할 얘기 있을 것 같은데.”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는 등 뒤로 감춘 손까지 꿰뚫어 보는 듯 깊었다. 경수의 눈을 볼수록 마음속 추가 불안하게 흔들렸고 주기는 점점 짧아 졌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떨림을 가라앉히려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없거든요? 아니, 그거 얘기하러 왔어요? 도경수 씨가 대체 왜요?!”

 

 

종대는 말을 하고도 아차 싶었다. 물음이 하나같이 다급했다. 숨길 게 있다 보니 조금함이 말투에도 묻어나왔고 과하게 날이 서 있었다. 낭패감에 얼어서 눈만 굴리는 데 정작 경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이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듯 여유롭게 머리까지 쓸어 넘긴다. 그러고서 하는 말에 종대는 맥이 풀려버렸다.

 

 

“근데 사람 현관 앞에 세워놓고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예의? 예의 운운하기에는 너무 당당하게 무례한 건 누가 봐도 넌데요. 기도 차고 어이도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지금 모습을 민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형, 도경수 성격 진짜 나빠. 갑자기 쳐들어오질 않나,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려고 하질 않나. 지금껏 봤던 경수와 캐릭터자체가 달라진 게 당황스러웠다. 종대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경수를 막아섰다.

 

 

“더 들어오지 마요.”

“한솥밥 먹는 식구끼리 너무 야박하게 구네.”

 

 

한솥밥을 운운하며 웃는 얼굴에 열이 바짝 올랐다. 야박? 이게 야박해? 제가 웃으며 같은 식구끼리 잘 지내보자고 했을 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다며 선 긋던 분 어디 가셨어요? 엮이지 말자고 철벽 세우던 분 어디 가셨어요? 종대가 이를 악 물었다.

 

 

“우리 그럴 사이 아니라면서요? 엮이지 말자면서요? 아니, 그리고 왜 아까부터 말이 짧으세요?”

 

 

심지어 말도 계속 짧아. 동갑이니 편하게 말을 놓자고 은근히 얘기 했을 때 칼같이 자르던 도경수씨 어디 가셨어요? 앞뒤좌우 어디서 만나도 다, 나, 까 에 격식 딱딱 지켜서 말 높이시던 분 어디 가셨냐고요.

 

혹시 몰래카메라인걸까. 여기 어디 사람들이 숨어 있는 거 아냐?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되니 이젠 내일 있을 토크쇼 전에 몰래카메라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성인기의 네임의 발현한 것과 네임으로 나타난 상대의 이름, 제 집으로 찾아온 도경수까지 말이 안 되는 것 천지였다. 게다가 거기서 정신 못 차리는 건 저 하나뿐인 것 같고.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훑는 사이 막아서고 있던 저를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경수를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 공간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는 경수가, 광활한 대지처럼 넓던 거리감을 갑자기 좁혀오는 경수가, 미칠 듯이 낯설었다.

 

 

“도경수 씨!”

“내 말이 짧은 게 불만이면 너도 잘라. 우리 동갑이잖아.”

 

 

이렇게 하면 공평하지? 어느새 거실 한가운데에 선 경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늘 봐온 제 집의 익숙한 배경에 낯선 도경수. 낯선 건 하나뿐인데 종대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절대 그럴 리 없는 일에, 기대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만큼. 제 동요를 들키고 싶지는 않아 눈을 돌렸다.

 

 

“...도경수씨는 빠른 93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가 형,”

“같은 소리하진 말고.”

 

 

제 말을 가로채는 틈 없는 방어에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잔뜩 뭉쳐있던 어깨에서도 힘이 풀렸다. 나한테 형 소리는 하기 싫은가보지? 93년생 도경수와 92년생 김종대. 분명 제가 형이 맞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라 종대는 더 중요한 것을 물었다.

 

 

“정말 왜 왔어요, 여기?”

“아까 말했잖아. 너 네임이 발현해서 왔다고.”

 

 

정말 그거 때문에 왔다니까? 단호한 대답에 어깨가 도로 긴장을 했다.

 

 

“...그게 도경수씨랑,”

“상관이 없을까? 글쎄, 난 있는 것 같은데.”

 

 

아니다. 확실히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에게 동의하는 경수에 종대가 걸음을 뒤로 물렸다. 뒤로 힘주어 감추고 있는 손목이 뻐근했다.

 

 

“소모적인 이야기는 이쯤하자. 내가 지금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거든.”

 

 

인내심이 바닥나는 줄 알았어. 경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떨어뜨리며 물러서는 종대를 쫓아왔다. 간격은 점점 좁아졌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섞일 정도의 간격. 종대의 눈이 흔들렸다.

 

 

“손목 이리 줘봐. 확인해보게.”

“뭐를 확인해요...? 도경수 씨, 모르시나본데 네임 공개요구는 고소감이거든요?”

“알아. 아니까 이리 줘.”

 

 

고개를 내저으며 벽에 등을 대는 종대의 행동에 경수가 피식 웃었다.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확인 못하는 건 아닌데. 경수가 벽과 종대의 등, 그 틈으로 손을 뻗어 오른손목을 잡아챘다. 종대는 남은 경수를 왼손으로 밀어내려했지만 저항은 금세 막혔고 한 손아귀에 잡힌 양 손목이 저릿했다. 잘 정리된 손톱이 손목 붙어있는 밴드 끝부분에 닿았고 밴드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경수를 차고 때려서라도 벗어나야 하는 데 오래 쌓아온 팬심이 상당한 반감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최대한 공격적이고 단호하게 보이길 바라며 이를 악 물고 눈에 힘을 줬다.

 

 

“너 그, 그거 떼기만 해봐.”

“내가 떼면 어쩌게?”

“고...고소할거야!”

 

 

바락 지르는 종대에 경수가 눈을 깜빡이다 이내 웃었다. 종대는 약이 오르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경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나오는 반말도 웃겼지만 고작 한다는 말이 고소라니. 고소한다고 해도 제가 멈출 수 있을 리 없는데. 천진한 종대는 예나 지금이나 귀여웠고,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저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기울인 경수가 종대의 눈을 마주했다.

 

 

“뭐로 고소할건데?”

“...네임보호법 위반으로 고소할거야! 네임보호법 1조 1항에 나와 있거든? 모든 네임은 네임으로써 보호받아야 하며 타인의 네임 공개를 강제하는 행위는 위법행위라고...”

“그래?”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데도 경수는 지나치게 여유로워서 줄줄 외던 종대는 말끝을 흐렸다. 하트 입술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나. 그렇다고 저 잘생긴 얼굴을 들이 받아버릴 수도 없고. 얼마 안 있어서 여름화보촬영이 잡혀있는 걸 뻔히 알면서 정강이를 걷어찰 수도 없고.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 데 경수가 손끝으로 천천히 종대의 손목을 쓸었다.

 

 

“혹시 그 다음 조항은 알아?”

 

 

나른한 움직임에 종대가 움찔거렸지만 경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 다음 조항은 있잖아,

 

 

“ ‘네임 상대가 공개를 요구할 경우에는 성립이 되지 아니한다.’ ”

 

 

그러니까 너는 나 고소 못해. 귓가에 속살거린 경수가 제 말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종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밴드를 뜯어냈다. 밴드가 붙어있던 자리에는,

 

 

‘도경수’

 

 

짙고 선명한 세 글자가 있었다. 제 이름이 밝은 빛을 내며 반짝이는 걸 확인한 경수가 달게 웃었다.

 

거봐, 너 나 고소 못한다고 했잖아, 종대야.

 

 

 

 

 

종대와 달리 경수는 일반적인 시기에 네임이 발현됐다. 15살 즈음이었나. 오른쪽 옆구리가 뜨겁고 당겨서 처음에는 맹장이 터진 줄로만 알았다. 맹장이 아니라면 다른 장기가 터졌거나, 터지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게 발현통이라는 건 병원에 가고 나서야 알았다.

 

발현통 자체가 개인차가 심하다고 했다. 사실 조금 따끔하고 말거나, 짧게 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데 경수는 진통제가 필요할 정도로 오래 앓았다. 그 때부터 제 네임 상대가 유난할 거라고 짐작은 했다.

 

 

‘김종대’

 

 

그 짐작이 이렇게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종대가 둘의 첫 만남을 언제로 기억할지 몰라도 경수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방송국 복도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고 옷자락 하나도 스치지 않고 그냥 지나치던 차였다. 그럼에도 그 찰나에 경수는 종대를 알아봤다. 옆구리에 자리한 이름이 반짝거리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온도 높은 빛을 내는 게 피부로 느껴졌고 온 맥박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만났다는 생각에 맘을 감추지 못 했는데, 종대는 경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니라, 느끼지 못했다.

 

18살의 종대는, 네임이 아니었으니까.

 

상대 네임이 있는 데 다른 쪽이 발현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고? 그게 가능해?

 

종대를 만난 뒤 경수는 네임과 관련된 연구 논문을 되는 대로 출력해서 읽었다. 수많은 논문 중 하나는 설명해주겠지. 직접 논문을 하나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료들을 뒤지고 연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럼에도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경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충분히 발현할 수 있고 오차범위로 1, 2년 정도가 있다고 치면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희망을 걸어뒀다. 하지만 종대는 어떤 징후도 없이 20살을 넘겼고, 21살을 넘겼으며 22살을 넘겼다. 네임의 발현따위 없이. 경수의 옆구리에 있는 이름만 의미도 없이 뜨겁게 깜빡일 뿐이었다.

 

오기가 붙어서 부러 종대가 속한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 주로 가수를 관리하는 엔터회사였기에 주변은 만류했지만 경수는 뜻을 꺾지 않았다. 가까이 있으면 발현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곁에 있을수록 꺾이는 희망은 비참했다.

 

종대를 마주할 때마다 반짝이는 외로운 신호가 원망스러워 종대를 밀쳐냈다.

 

 

“아뇨, 우리가 따로 연락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연락처를 달라는 네게 못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없다고 말했다. 서러운 얼굴이 며칠을 괴롭히며 따라다녔다. 후에 말을 편하게 하자는 너를 불편하게 하고 내 앞에서 한 번 더 웃으려 애쓰는 너에게서 눈을 돌렸다. 선 밖으로 내어 쫓고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를 쳤다. 종대가 스케줄을 취소해가며 저를 피할 때까지 계속 됐다. 그럴수록 아픈 건 나였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원망의 방법이었다.

 

너는 나를 혼자 빛나게 뒀으니까.

다른 ‘김종대’가 아니라, 분명 넌데.

 

 

“앞으로 엮이지 말죠, 첸 씨랑 저.”

 

 

그 말을 할 때 경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내가 네 네임이라고, 내가 네 운명이니 제발 알아봐달라고 종대를 붙들고 애원을 쏟아내고 싶은 수많은 날들을 꾹꾹 누르고 참다보니 인내심은 재만 남았다. 아리고 쓴 원망만이 남아 속을 상하게 만들었다. 긴 시간동안 발현하지 않는 종대를 기다리는 것도 지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는 종대를 볼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은 감정을 참아내는 것도 지쳤고, 가장 지치는 건 끈질긴 제 마음이었다. 엮이지 말자 입으로는 뱉으면서 종대와의 운명의 교차점을 구걸이라도 하고 싶은 제 마음.

 

그러다 겨우 오늘이었다. 겨우, 오늘.

 

한 시간 전의 경수는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내일 토크쇼에서 종대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가슴께가 답답했다. 고작 토크쇼를 피하자고 은퇴라니 누가 들으면 비웃겠지만 제겐 고작이 아니었다. 나가면 분명 동갑내기 친구, 절친이라며 저와 종대를 엮어댈 게 빤한데 그곳에서 생각 없이 웃고 있을 자신이 없다. 종대와 친구라는 이름에 매이는 건 곧 죽어도 싫었다. 그게 좋았으면 처음에 제게 번호를 달라는 종대에게 선뜻 줬을 거다. 아니, 묻기도 전에 핸드폰을 내밀었겠지.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친구 따위’가 아니었고 종대는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새카맣게 몰랐다. 그러니까 그렇게 맑게 저를 볼 수 있었겠지. 사납게 비죽 웃은 경수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가고 싶지 않은 이유 그것만이 아니다. 제 옆에 서서 울 듯 웃는 서러운 얼굴을 보며 손을 뻗지 않고 계속 참을 자신도 없었다.

 

사실 이게 제일 컸다. 일부러 아픈 말만 골라서 뱉어놓고 그로 인해 받은 종대의 상처를 보고 있으면 제가 더 아팠다. 네임의 영향인지 아니면 상대가 종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럴 바에는 마주칠 수 없게 아예 이 바닥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미간을 좁히고 한참을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 옆구리에 종대의 이름이 있는 이상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쓸었다. 홀로 뜨거운 네임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자리하고 있는 이상 평생 볼 수 없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 분명했다. 더는 빛나지 않고, 더는 뜨거워지지 않는 네임을 느끼며 아마 서서히 얼어 죽을 것이다.

 

 

“지긋지긋하다, 진짜.”

 

 

떠나지도 그렇다고 다가가지도 못하는 이 빌어먹을 상황은 개선될 수가 없는 건지. 자조적인 숨을 뱉은 경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개선이 되려면 종대의 네임이 발현을 해야 하는 데... 지금까지 안 된 일이 이제 와서 될 리가.

 

끝도 없이 가라앉는 생각을 비우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인터넷이나 보면서 시간이라도 죽이려고 모바일 웹을 눌렀는데 포털 사이트에서 눈에 걸리는 검색어가 있었다.

 

 

[첸 네임]

 

 

검색어 하나를 누르는 데 몇 번이나 손이 삐끗했는지 모른다. 떨려서. 기사가 끌어다 쓴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도 떨림은 멈추질 않았다. 그 뒤로는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는지 모를 일이다. 소속사에 전화를 하고 막무가내로 종대의 주소를 받아냈고 택시를 탔다. 도저히 운전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와중에 제일 단정하고 좋은 옷을 찾아 입고 온 제가 용했다. 제가 찾아가면 종대는 놀랄 게 뻔했지만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벌어졌고, 그것만으로 경수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택시 안에서 확인한 기사들은 난장판이었다. 종대의 네임 발현의 여부에 대한 기사가 초가 바뀔 때마다 쏟아져 나왔고 댓글 창은 하나같이 소란했다. 화면을 껐다. 전부 쓸모없는 기사들이었다. 포털과 학계에서 떠들어대는 최초 성인기에 발현한 네임? 그런 건 경수랑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네가, 이제라도 내 이름을 가졌다는데.

네가, 나로 빛난다는 데.

 

종대의 손목을 쥐고 그 안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제 이름 석자를 손끝으로 찬찬히 쓸어본 경수가 환하게 웃었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이 ‘도경수’가 정말...”

 

 

너야? 네가 맞아? 손목에서 눈을 못 떼며 묻는 종대에 경수는 종대를 끌어당겨 안았다. 수년 동안 말하지 못하고 삼켜온 말들을 품안에 담아 꾹 안았고 저항 없이 끌려와 안기는 몸은 품에 신기하리만큼 꽉 맞았다. 오래전부터 상상해왔던 그대로. 조금의 오차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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