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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김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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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과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Landscape

w. 라즈벨 (@Raspbel921)

 

 

 

 

2016년 6월 2일. 첫 번째 뉴스 소개하겠습니다.

오늘 드디어 신인류 ‘NAME’ 부서에서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모든 네임들은 각자 자신의 네임을 찾게 되면 능력, 일명 초능력이 발현된다는 연구 결과와 함께 그 능력을 네임의 약 89%가 발휘하는 법을 숙지하지 못해 쓰지 못한다- 라고 오늘 오후 3시에 발표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네임인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네임 부서는 네임은 필수로 유아기 때부터 꾸준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세한 연구 결과는 14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발표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며...

 

 

 

 

“이번 일은 굉장히 중요한 거야.”

“예.”

“잘하면 너랑 지호랑, 하나씩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어쩌면 마지막 기회니까. 잘 해라.

 

 

 

  듣기 싫은 큰 굉음을 낸 문이 크게 흔들리며 닫혔다. 문에는 ‘Landscape’(풍경) 이라고 휘날겨 쓴 판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Landscape, 줄여서 Ls. 개인주의적인,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신분제도인 곳. 풍경에 걸맞은 이름의 ‘Star’라는 이름의 급을 매기며 위아래가 정해지는 곳이다. 비밀리에 움직이는 곳인 만큼 아랫것들은 제대로 된 임무를 하기도 전에 윗사람들의 죄를 뒤집어써 잡혀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가슴팍에 겨우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종대가 임무를 받은 건 Ls에서도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10개의 신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곳에서 겨우 3개의 별이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언제 검찰한테 소환이 와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위치일 정도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위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대 또한 그 길을 걷고 있던 중 본부로 소환 받아 임무를 얻게 되어 기분이 좋아 방방 뛰었다. 옆엔 함께 임무를 하게 될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이지호’라고 소개한 사람은 가슴팍에 별을 다섯 개나 달고 있었다.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종대에게 살핏 웃어준 것을 보면 그렇게 모질지는 못하나 보다, 라고 생각한 종대는 집으로 돌아와 임무를 곱씹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호화로운 파티의 찌꺼기 처리, 라니. 과연 찌꺼기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데 말이야. 가장 쓸데없는 생각을 한 종대가 눈을 감았다.

 

  금색에 하얗게 줄이 그어져 있는 카드를 받은 사람이 검은 슈트를 어색하게 큰 품으로 입은 종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도 입장은 해야 하는 것이라 자신의 선에서 가장 비싸게 입은-그래봤자 그 기업들 사이에선 가장 싸구려겠지만- 먹색 커프스 버튼이 달린 옷을 진득하게 훑은 경호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도장을 콱 찍어줬다. VIP. 종대에게 가장 아이러니한 이름의 도장이었다.

 

“파란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

아, 오늘은 검은색으로 하고 왔다네요. 먹색 커프스를 달고 있고.”

“.. 그럼 제가 어디 위치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알려드릴 테니 일단 저쪽에 서있으시죠.”

 

  제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요. 마지막 말까지 들은 종대가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자신이 받은 가장 큰 임무인 만큼 허점이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햇빛을 영영 못 보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매일 눈을 뜨면 새까만 철장을 보기는 싫었다. 지나가는 곳마다 유명 기업들의 회장과 딸린 자제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모두들 어느 시리즈의 한정판이라는 것을 치렁치렁 매달고 요즘 뉴스에서 보던 몇 십만을 호가한다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곤 호호 웃고 있었다.

어차피 다신 못 올 꿈도 못 꿀 파티, 천장에 닿을듯한 높이에 서있던 종대가 피식 웃었다. 누군 이러고 사는데, 저들은 저러고 사네. 그때-

 

핑. 팡. 펑.

 

 

총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종대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느 곳에도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종대밖에 없었다. 지호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원래 없었다는 듯이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종대가 급히 몸을 숙이고 창문에 총을 조준했지만 팽-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총알이 먼저 창문을 뚫었다. 그 총알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생각할 틈도 없었던 종대가 급히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밖 잔디로 착지한 종대가 오른쪽으로 몸이 풀썩 기울었다. 내려다본 다리에서는 새까만 선혈-밤이었으니 새까맣게 보였던 건지, 정말 피가 그랬던 건지는 아직도 기억이 안 난다-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디에, 어떻게 맞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감각이 없는 다리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굳게 잠겨있는 대문과 높고 높은 담장 사이가 마치 자신을 가두고 있는 미로인 듯했다. 끝없는 미로가 펼쳐지고 이 미로의 출구는 없었다. 또한 입구도 없었다. 이 미로의 문을 연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자 이내 피식 웃음이 났다. 햇빛을 못 보며 죽긴 하네, 라는 생각이 들 때쯤 환하게 열려있는- 검은빛 장미가 수놓아진 대문이 보였다. 종대는 무턱대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디 눈을 다시 떴을 때, 햇빛이 보이길. 그리고 미로의 끝이, 검은 장미였길.

 

아릿한 통증이 깊었던 잠을 깨웠다. 눈을 뜬 종대는 순간 이곳이 천국인 줄 알았다. 온통 새하얀 벽에 고작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누워있는 새하얀 침대. 곧 망가질 듯 깜빡이는 흔들리는 하얀 빛. 이게 뭐지. 생각하자 급하게 종대는 자신의 슈트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총을 꺼내든 종대가 급히 침대 옆과 벽 사이인, 방의 모서리 쪽으로 이동한 후 엎드려 몸을 숨겼다. 총을 하얗게 칠이 된 문쪽으로 조준했다. 이곳이 어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Ls에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흔한 소문 따위 듣지 못했으니, 분명히 다른 곳일 것이다. 아, 이곳도 미로인가. 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어느 집으로 들어왔던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성 따위 없었던 행동이었구나.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벌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종대는 땀이 깊게 밴 손으로 총을 고쳐 잡았다. 평소에 듣던 굉음은 없고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이 더욱더 종대의 심장을 옥죄였다. 탁- 안전장치가 풀렸다.

 

“아, 깨어나셨네요.”

“...”

“꼬박 하루였습니다. 그래도,”

“...”

“회복은 빠르시네. 이틀은 누워계실 줄 알았더니.”

 

  하얀 방과 이질감이 있는 검은 셔츠에 새까만 슬랙스를 입고 나타난 남자의 손엔 새하얀 쟁반과 손수건이 놓여있었다. 종대는 총을 쥔 손을 더 힘주어 쥐었다. 남자가 무슨 말 하나라도 더 하면 쏘겠다는 듯이 방아쇠를 힘주어 감쌌다.

 

“이곳에서는 총은 금지입니다, 종대씨.”

“...”

“저를 쏘신다면.. 어쩔 순 없겠지만.”

 

뒷감당은, 종대씨 몫입니다.

전 분명히 경고 드렸으니까요.

 

  그 말은 종대에게 날아와 온몸을 감싸는 듯이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총을 쥔 손의 긴장이 놀랍도록 풀리고, 두려움에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된 떨림은 종대를 아무 생각도 못하게 만들었고 그 남자가 자신의 코앞에서 총을 쥐어 침대 반대편으로 던져버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감당을 종대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말이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이 남자의 낮고 낮은 목소리가 두려웠던 걸까. 벌벌 떨리는 손을 뒤로 숨겨봐도 두려움에 젖은 얼굴은 감출 방법이 없었다. 무릎 펴 볼까요, 오른쪽 다리요. 하는 말에 조심히 다리를 내민 종대는 이내 자신이 총에 맞은 것으로-추정되는- 다리를 살폈다. 남아있는 기억에서 본 검은 선혈은 꿈이었다는 듯이 멀쩡하게도 움직이는 다리는 낯설기까지 했다.

 

“괜찮은 거 같네요. 움직이시는 거 보면.”

“...”

“다리는 괜찮아지셨는데, 말은 못하시나보네.”

 

  검은 옷에 조금은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어 보인 남자는 종대의 팔 안쪽을 들어 종대가 제대로 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어려움 없이 종대가 서보이자 남자는 한 쪽 입꼬리가 깊게 파일 정도로 웃어 보이며 종대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제 이름은, 도경수입니다.”

“...”

“당신을 아무 보상 없이 치료해준 사람이고. 아, 직업이 의사이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여긴 어디죠?”

“이제야 물어보시네요?”

 

제 생각보다 조금 판단이 느리시나 봅니다. 이곳은 제 집이에요. 왜 제 집이냐고 물어보시면.. 종대씨가 더 잘 아실 거예요. 왜냐면 제 마당에 누워계셨으니까. 저 취객인 줄 알았다니까요. 피냄새만 아니었음 경찰을 부르려 했어요. 아, 말이 많아졌네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종대씨 앞이라 그런가. 아, 농담입니다.

 

“..아.”

“설마 기억 끊기셨어요?”

“아뇨.. 아뇨. 감사합니다.”

“...”

“경수씨.”

 

  종대는 경수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두 발자국 멀어지려 발을 옮겼을 때 자신의 뒤가 벽이고 자신이 지금 벽과 경수 사이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나오자 아까 농담이라고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굳은 표정의 경수가 방문 쪽으로 이동한 후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러자 또 살짝 웃으며. 나오셔야죠? 종대씨.

 

  경수의 집은 지나치게 넓었다. 방 밖으로 나와 보니-사실 방 밖도 온통 하얀 페인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을 줄 알았다- 여러 곳에서 심심치 않게 여러 기업의 고가 장식들이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을 쳐다보는 걸 느낀 경수가 작게 헛기침하기도 했지만 전부 듣지 못한 척하던 종대가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이 집이 이층으로 되어있는 구조이고, 자신이 있는 곳이 이층 제일 끄트머리에 있다는 걸 알았다. 멀찍이 있는 1층 거실을 보던 종대가 경수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는 경수가 이미 층과 층을 이어주는 계단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밥이나 먹을까요?

 

  경수가 차려준 음식들은 자신이 앉은 번쩍거리는 크리스털 탁자에 비해선 지나치게 간소했다. 그저 자신이 혼자 살면서 먹던 반찬들과 다를 것이 없어 종대는 놀라 잠깐 주춤했지만, 경수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탓에 살짝 웃어 보이며 수저를 들었다. 물론 맛은 자신의 집에 며칠째 썩어있었던 반찬들보다 몇 배는 더 좋았다. 또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처음인가. 슬쩍 웃음이 났다.

 

  집을 나오기 전 잠깐 과일을 먹었다. 얘기를 나눈 것으로 종대는 경수의 직업을 알게 되었다. 경수는 우리나라 경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W기업 회장의 전담 의사라고 했다. 또 뜻하지 않게 이 집의 모든 것들이 회장님이 해주신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 이 집까지.-종대가 경수씨가 직접 고르시는 건 뭐예요? 라고 물어보자 경수는 살짝 웃으며 부엌 쪽으로 턱짓했다. 재료요. 요리 재료.-

그렇게 정신없는 약간은 몽롱한 상태로 경수와 생산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대는 번쩍 지호가 생각났다. 그 총소리가 나고 난리가 날 때 지호가 없었으니 자신의 기억에서도 지호가 묻혀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종대는 허둥지둥 일어나 벗어두었던 싸구려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아, 제가, 그, 저희, 아. 동료가. 있어서,”

“아, 이지호?”

 

  종대는 품이 큰 정장 자켓에 팔을 끼워 넣다 경수가 있는 거실의 쇼파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경수는 자신과 얘기를 나눌 때보다 더 깊이 소파에 누워있었다. 사실 앉았다는 표현보다는 누워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소파에 팔을 기대고 다리를 길게 뻗으며 자신을 마치 내려다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지켜본 사람처럼. 마치 크나큰 정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맹수 한 마리를 보는 기분에 휩싸인 종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경수를 멀찍이 서 바라보고 있었다.

 

“지호군은, 괜찮을 겁니다.”

“...”

“음.. 아마 지금쯤이면 집에서 쉬고 있겠네요. 지호군 집이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런데, 종대씨는. 왜 아무도 안 찾죠?”

 

신기하네. 중얼거리며 탁자 위에 놓여있던 잔을 든 경수가 탁자 밑에 있던 서랍을 소리 내며 열었다. 나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작게 고민하던 경수가 새까만 와인을 꺼내 잔에 따를 때까지도 종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경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이 무의식에 빠져 있을 때 정말 아무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나, 였고. 그다음 생각은 경수한테 자신의 직업을 말한 적이 있나? 였다. 무언가에 취한 듯 어지럽고 몽롱한 기분이었긴 했지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누가 저는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이러 다니는 직업을 가졌다고 말을 하겠는가.

그런 어지러운 생각들에 빠져있을 때 경수가 잔을 큰 소리로 내려놓았다. 흠칫 놀란 종대는 허겁지겁 현관으로 향해 뛰었다. 그 얼마 안 되는 거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거쳐 온 세월보다 길었고 그 걸음마다 따라붙는 시선에 종대는 자신의 알몸을 보여준 기분까지 들었다. 모든 수치스러운 짓을 당한 기분이었다.

 

“가시는 겁니까? 돌아가실 곳은 있으신지,”

“경수씨!”

“...”

“제발.. 제발. 그만해주세요.”

 

힘겹게 신고 온 발 아픈 구두를 끼워 넣던 종대가 주먹을 꽉 쥐고 경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종대가 이 집에 발을 들이고 난 이후로 가장 큰 소리를 낸 것이 예상했다는 듯이 쳐다보던 경수가 이내 얼굴에 매너 좋은 웃음을 보였다. 소파에서 살짝 몸을 일으키며 현관 앞까지 나와 자신을 배웅해주려는 의사까지도 보였다. 여전히 꽉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며 씩씩거리던 종대가 뒤돌아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띠링- 하는 정없는 소리가 울리고 문이 활짝 열리자 환한 햇살이 경수의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곧 다시 봅시다. 종대씨.’ 경수의 목소리가 마치 환상처럼, 꿈처럼,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

 

  어떻게 자신이 이곳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종대는 정신없이 Ls를 향해 뛰어왔다. 오른쪽 다리에 총이 박혀있었고 새까만 선혈이 흐르던 그 밤은 꿈이었다는 듯 멀쩡하기만 한 다리를 끌고 무작정 본부로 뛰어 들어왔다. 사실 이곳에 와봤자 자신이 무얼 할 수 있고 가슴팍에 별을 이만큼이나 달고선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 어떤 것들을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은 그저 있으나 없으나 한 머릿수 채우는 별 3개짜리 조직원일 뿐인 것을.

 

“아, 왔나?”

“..예.”

“어제 지호가 왔다 갔네. 널 못 봤다길래. 나는 또.”

“...”

“하하. 농담이다. 표정 풀고.”

 

사실 그 건에 대해서는 우리도 조사 중이라 너한테까지 말은 못 해주겠네. 그 의뢰 자체를 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니 그렇게 많이 걱정은 하지 말고. 아, 지호는 잠깐 어디 갔다 온 사이에 회장이 난장판 되어있어서 급하게 뛰어나왔다고 하더라고. 너는 어떻게 빠져나온 거니? 아. 그래,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뭐 우리가 말하라고 협박은 하지 않을 테니. 안 그래도 요즘 돈을 제대로 가져오지 않는 애새끼들이 있어서 협박을 좀 하느라 힘이 부치거든.

 

 

.

 


  어지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억지웃음만 짓다 오느라 입에 경련이 오는 듯했다. 크게 울렸다 닫힌 문을 뒤로하고 매트리스에 풀썩 누워버린 종대가 눈을 감았다. 이대로 마냥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너무나도 자신에게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온 일들의 짐을 저 혼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누런 천장을 보고 누운 종대가 안주머니를 뒤져 작은 총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음과 동시에 안주머니에서 손에 걸치는 종이쪼가리를 들어 본 종대가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 피곤하다.
‘W기업 회장 WLL 전담의 도경수.
서울시 DD구 CC동....
010-.....‘

 

아무 장식도, 색도 없는 하얀 명함이었다. 무채색의 명함.
마치 자신이 오늘 아침까지 쉬고 있던 그 방처럼, 온통 하얀색뿐인 명함이었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하늘 중천에 높이 떠 있었었다. 굳이 시간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자신이 늦게 일어났다는 것을 종대는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컵을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는 멍하니 자신의 집을 둘러보았다. 그저 그런 작은 무늬가 새겨져 있는 벽지에 2인용 소파 하나, 매트리스 하나, 큰 맘 먹고 질러버렸다가 며칠 동안이나 밥을 굶었던 32인치 티비 하나.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부엌. 그 흔한 탁자나 테이블도 없었고 성한 의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순간 경수의 집이 생각이 났다. 또 경수의 집과 비교되는 자신의 집이 부끄러워 뛰쳐나왔던 것이다.
물론, 그랬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이 명함을 꺼내 들고 새까만 검은빛의 장미의 앞에 다시 서 있을 일이 없으니.

 

천천히 열리는 문 앞에는 어제와는 다르게 새하얀 셔츠를 입고 단정한 슬렉스를 입고 있는 경수가 시원하게 옆으로 넘긴 머리를 하고 입술을 올려 웃었다. 오셨어요? ...네. 마치 종대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였다는 움직임이었다. 빈틈없이 철저했고 또 다정했다. 또다시 종대는 경수의 집 안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 묵직한 소리를 낸 대문이 굳게 잠겼다. 쿵-.

 


뜻하지 않게 저녁까지 함께한 뒤 둘은 쇼파에 멀찍이 앉았다. 종대네 집에 있던 2인용 쇼파처럼 작지 않아 자신의 행동에 서로가 걸리지 않게끔 떨어져 앉을 수 있었다. 아무 감정 없이 보던 77인치 텔레비전에서 감정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후 3시경, I역 부근에서 한 남성이 분신자살을 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검사결과 남성은 네임(NAME)으로 밝혀졌습니다. 남성은 자신의 네임을 찾은 뒤로 잦은 만남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남성의 네임이 자신의 결혼을 통보하자, 남성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어디선가 네임의 죽음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네임 연구소 측은 전 지역 24시간 집중 순찰을...

 

“네임의 인생은, 참 슬픈 것 같아요.”
“...”
“한 사람에게 매달려 살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이 걸려있다니.”

 

텔레비전의 모니터를 보는 종대의 눈이 선하게 촉촉해졌다. 네임은 자신의 네임에게 어쩔 수 없이 끌린다. 또 자신의 몸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이가 죽는다면 자신도 며칠 뒤 89% 확률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뒤 온 나라가 술렁였다. 그럼 네임들은 온통 줄줄이 소시지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가, 라는 주제로 여러 논문과 반박문 등 많은 의견들이 나왔지만 정확한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 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네임의 자살은 1년에 두 번꼴로 있는 일들이라 크게 이슈화되지 않고 다음 뉴스로 넘어가는 것을 보던 종대가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여전히 어디 나라에서 해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대는 경수의 침묵이 동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고 싶었다. 경수의 눈빛이 지나치게 깊었으므로. 뉴스에서 열을 올려 떠들어대고 있는 저 깊은 바닷속처럼. 그것들에 용기를 받은 것인지 종대는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버려두며 말을 꺼냈다.

 

“경수씨. 어쩌면 저도 네임일지도 몰라요. 제 허벅지에 큰 흉터가 있거든요. 음, 불로 지진듯한 흉터인데 많이 무뎌져서 이젠 아프지도 않아요. 사실 아팠던 기억도 없어요. 제가 처음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거든요. 이상하게 제 어릴 때의 기억이 하나도 없네요. 조금 슬퍼요. 제가 기억나는 건.. 16살 때부터 총을 들었다는 거? 사실 16살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저보고 16살 꼬맹이, 라고 불렀거든요.”
“...”
“그 이전의 기억은.. 누가 잘라간 것처럼 없어요. 정말.”
“..아.”
“이 흉터를 볼 때마다 생각해요. 내가 사실 네임이 아닐까? 이곳에 나의 네임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요. 참 웃긴 일이죠.”

 

  경수는 자신의 긴말을 들으며 아무런 반응 없이 행동했다. 종대는 순간 저 혼자 자신의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주절주절 떠든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러나저러나 자신과 만난 지 이틀도 안 되어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한 것이, 아니 애초에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네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처음이라 종대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종대는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왜 말을 했는지 후회스러웠다. 종대는 머리를 푹 숙이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었다.

 

“저는 네임이예요.”
“..네?”
“제 발목에 네임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없지만.”
“...”
“수술을 했거든요. 어쩔 수 없었죠, 뭐.”

 

  종대는 놀라 크게 뜬 눈을 하곤 고개를 올려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도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깊은 눈에 빠질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텔레비전은 꺼져있었고 이 넓은 공간에 자신과 경수, 둘 뿐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허우적댔다. 휩쓸린 건 이름 모를 나라가 아닌 자신의 마음인 것 같았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해 얼어있는 종대를 본 경수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참 감정에 솔직한 사람. 저래서 어떻게 총을 잡았는지 모를 정도로 얼빠진 종대의 표정에 마냥 웃음이 나왔다.

 

“그럼.. 네임이 누군지 모르시는 건가요?”
“네. 이젠 뭐,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이니까요. 있었던 것만 기억날 정도예요.”
“...경수씨는 불쌍한 인생을 살고 계시네요.”
“왜죠?”
“네임이 가지고 있다는 욕망 하나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으시면서 당신의 네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느 순간 죽으면 경수씨는 그냥 그대로 죽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하하. 제 네임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실까요.”
“...”
“잘 모르겠네요.”

 

  환하게 입을 벌려 웃는 경수를 보던 종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분위기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기도 했다. 또 경수의 눈을 보며 얘기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경수의 눈은 뭐든 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신이 굳게 지켜왔던 비밀까지도 전부 허물없이 거짓 없이 말을 한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버렸던 것이다. 다 말해버렸으니. 자신이 지금까지 굳게 지켜왔던 치부들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것도 경수의 앞에서만 이렇게 된다는 것이 더욱 종대를 깊은 바닷속으로 내몰았다.

 

“저 가봐야겠어요, 시간이 늦었네요.”

 

  어제처럼 경수는 신발을 주워 신는 종대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하지만 다른 것은 분명 있었다. 어제와 같은 두려움은 모두 꿈이었다는 듯 마치 제집 같은 편안함 따위가 있었다. 종대는 그것을 경수의 현관에서 느꼈다. 자꾸만 신발을 끼워 신는 손이 느려지고, 머물고 싶은,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목에서 아릿한 압박이 느껴졌다. 

 

“자고 갈래요?”
“...”
“종대씨.”

 

  잡혀버린 건 손목뿐만이 아니었다.

 

 
  경수가 안내해준 방-사실 온 방이 하얀 페인트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으로 자리를 옮겼다. 좋은 꿈을 꾸라는 경수의 말과 함께 방문이 소리 내어 닫혔다. 왠지 모를 설렘이 외로움으로 바뀌었다. 함께 있어 줄 것을 따로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

 


  아무렇게나 시간을 흘려보낸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평소처럼 특별함 없이 흘러가는 일상이 지루했다. 바뀐 건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어떠한 것을 바란 것일까. 애초에 나에게 제대로 된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뭐든 기대하지 않고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허공에 던진 질문에 답해줄 사람조차 없었다. 
띵,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

 


“부르셨습니까.”
“새로운 건이 들어왔는데, 너에게 딱 맞을 것 같아서.”
“...”
“내가 직접. 너한테 연락하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저쪽에 서류 있으니 가져가 봐.”

 

  방 안의 비릿한 피냄새가 온몸을 휘감았다. 빳빳한 검은 색의 서류를 들어 품 안 깊숙하게 숨겼다. 작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갈 때 웃음소리가 귀를 찌르듯이 박혀왔다. 나는 애써 그것을 듣지 못한 척 해야 하는 위치였다. 가슴 언저리엣 빛나는 별은 그런 의미였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도 듣지 못한 척 해야만 하는.

 

 
.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매트릭스에 몸을 푹 파묻은 종대가 길게 한숨 쉬었다. 얼마 지났다고, 또.

 

“...쉬고싶다.”

 

  아무런 걱정 않고, 불안해할 필요 없이. 몇 달이 지나도 없던 일들이 한 달 새에 몇 개나 들어오는 것들에 의심할 것 없이. 문 밖의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편하게 밥을 먹고 흔한 예능 프로를 보며 웃기도 하고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잠드는 하루. 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는 말을 속삭이는 날들을.
경수씨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겠지. 나와 짧게나마 함께 했던 것처럼. 함께라는 말은 이렇게 행복한 꿈같은 거였구나. 
  함께 밥을 먹고 그릇을 정리하는 경수씨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 작게 웃어주던, 큰 쇼파에 앉아 지루한 뉴스채널을 보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조금 더 가깝게 앉던, 또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 라며 웃어주던. 경수씨 보고 싶네.

 

  이를 드러내며 헤헤 웃던 종대가 매트릭스에서 벌떡 일어나 집에 오자마자 저 멀리 던져두었던 검은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바로 내일 있는 일이라고 했으니 후다닥 끝내고 경수씨 집에 한 번 들려야겠다. 이번엔 내가 요리해드리고 싶으니까 마트에 들려서, 경수씨네 집 근처에 마트가 있던가? 연락이라도 해볼,

 

도경수 (24) 
현재 W그룹 회장 전문의
H호텔 파티 참가 예정(의상 착의는 당일 전달)
의뢰인: 요즘 W그룹 회장의 몸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그 재수 없는 꼬맹이 의사가 영감 다 살려놓았으니.

 

...
하얀 종이를 다시 까만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멈췄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간헐적으로 숨이 내뱉어졌다. 덜컥 막혀오는 숨이 멎어버릴까 두려웠다. 
검은 봉투를 다시 들어 그 안의 종이를 꺼냈다. 눈부시게 하얀 종이엔 다른 임무들과 비교적 짧은 프로필과 이름 옆의 사진이 흑백으로 프린팅 되어 위태롭게 붙어있었다. 흑백임에도 익숙한 사진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
내 세상은 이토록 절망적인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불행했던 걸까. 
나에게 함께라는 말은 결국 사치였다. 꿈꾸지 못할, 기대하지 못할 일들이였다.

 

 

.

 

 

“왔어요, 종대씨?
“...”
“점심하던 중이였는데, 들어와요.”

 

  경수의 집은 그대로였다. 마치 어제 왔었던 것처럼 그대로인 것에 자꾸 눈길이 갔다. 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낯선 것들에 눈길이 돌려졌다. 아무렇게나 놓여있지만 꼭 맞춘 듯 자리 잡아 있는 화분들, 하얀 벽지들에 걸려있는 새파란 나무 그림들. 그동안 눈길 주어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종대의 눈에 행복이 비췄다. 그렇게 검은 만년필들이 담겨있는 분홍빛이 도는 작은 컵까지 담은 종대가 마지막으로 경수를 보았을 때, 종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미간이 푹 파인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종대가 처음 보는 경수의 모습이었다. 
어느 경우에서든 낯선 처음은 두려웠다. 늘 익숙함을 찾고 바라던 종대에게는 경수의 눈빛이, 마치 자신이 이상하다는 듯이 인상을 힘껏 찌푸린 채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눈빛이 두려웠다. 자신의 처음부터 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다는 듯이 꿰뚫어 보고 있는 눈빛.

 

“아니, 경수씨, 그게 아니라요,”
“...”
“이게 아니라, 그, 있잖아요.”

 

 인상을 부드럽게 푼 경수가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앉아요.

 


  오가는 말 하나 없이 점심을 마치고 접시를 정리하는 경수의 뒷모습을 본 종대가 식탁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내일 내가 쏴야하는. 목표일까. 검지와 엄지를 쭉 펴 총의 모양을 만든 종대가 입으로 작게 소리 냈다. 팡. 
아무래도, 자신은 못할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식탁 아래로 내려 마주잡았다,

 


 재미없는 뉴스 얘기들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깨주는 앵커의 나긋한 목소리가 눈물 나게 다정했다. 

 

“다음부터는 이곳에 오셔도 제가 없을 거예요.”
“..네?”
“회장님이,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거든요.”
“...”
“살만큼 사셨는데도 뭘 그리 더 하시려는지.”

 

  경수가 들고 있던 화려한 장식이 수놓아져 있는 꽃차가 찰랑거렸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경수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것이 무색해졌던 종대가 네?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당황한 종대는 살짝 미소 지은 표정으로 말하는 경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빛을 비추어 반짝이는 유리 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부시게 빛이 났다.

 

“경수씨가 봐주시는데 악화되신다고요?”
“뭐, 제가 해드리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럼, 그걸, 언론 매체에 말하는 건 어때요? 그렇게 하면, 회장님도, 뭔가 하시지 않을까요?”
“..예?”
“그러니까, 지금 당장, 오늘. 오늘 말할까요? 제가 잘 아는 분이 계시는데, 어, 그, 분이 되게 기사를 잘 쓰시거든요. 아마 제가 부탁드리면 해주실 것 같은데. 어, 연락이라도.”

 

  종대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어 휴대폰을 찾던 손을 불쑥 멈추었다. 자신도 모르던 자신의 마음들이 새어나와 버린 것에 가슴 언저리가 턱 막혀왔다. 스흡, 하고 숨을 멈춘 종대가 천천히 경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두려웠다. 내가 처음 만나는 경수씨가 있지 않을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는 시간들은 지나치게 길었다. 턱이 덜덜 떨려왔고 다리 사이로 감춘 손에 땀이 깊게 배여 들어갔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경수와 눈을 맞췄다.
아까와 같은 심장이 덜컹이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소름 돋게 울렁이는 가슴팍이 종대의 눈을 따갑게도 찔러왔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흐를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종대는 차마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환하고 순수하게 웃고 있는 경수를. 눈꼬리를 깊게 접은 경수가 전에 보지 못했던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왜 웃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할 겨를 없이 손의 땀이 식을 정도의 울렁임에 다시 고개를 푹 숙인 종대가 중얼거렸다.

 

“아, 아니. 죄송해요 경수씨.”
“...”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경수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종대를 보고 있었다. 발로 대리석을 탁탁 두드리며 흔들리는 경수의 발소리가 뉴스가 끝난 후 나오던 광고 CM송보다 크게 울려왔다. 바로 귀 옆에서 두드리는 듯 깊고 크게 울려왔다.

 

“종대씨는 자신의 네임이 어떤 사람이였으면 좋겠어요?”
“..네?
“종대씨의 네임은, 어떤 분일까요?”
“...글쎄요.”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낮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맑게 울리는 소리들에 무거운 말들이 오갔다. 사실 종대는 자신이 네임일지 아닐지도 몰랐다. 어릴 때의 기억이 전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교육받은 것조차 없었고, 부모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또 가끔 나오는 뉴스에서의 지루하게 떠들어대는 ‘네임’이라는 주제는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자신은 네임이 가지고 있다던 네임이 네임을 향한 끌림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런 마음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경수가 자신의 네임에 대해 얘기하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더욱 고개를 푹 숙였지만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경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경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
“...”
“적어도, 저보단. 다정하지 않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어진 말에 새빨개진 얼굴을 한 종대가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치부를 들킨 듯 부끄러웠지만 행복했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꺼내본 것이라. 나는 다정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어느새 마주 잡고 있었던 손이 새하얗게 질린 것을 보던 종대가 순식간에 민망해졌다. 주변 공기가 무겁게 몸을 짓눌러왔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 없는 경수가 의아했다. 혹여나 자신에게 어떠한 말이 쏟아질까, 라는 생각에 두려워 고개를 들려고 할 때, 따뜻함이 온 몸에 전해 들어왔다. 종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오는 손이 단단하게 종대를 받쳐 끌어 당겼다. 머리에 닿은 큰 손이 종대의 이마를 어깨에 닿게 하도록 힘주어 눌렀다. 아무런 말없이 끌려간 종대가 빈틈없이 경수와 닿았다. 경수의 품에 깊숙하게 안겨버린 종대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어물쩍거렸다. 갈 곳 없는 손에 자꾸만 땀이 배어 새어나왔다. 축축해진 손을 꽉 쥐었다. 아무도 볼 수 없게끔. 그리곤 눈을 꽉 감아버렸다. 아무도 이곳에 없는 것처럼. 그러자 조금 더 감각에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누런 벽을 등지고 매트릭스에 파묻혀 있던 것보다 더욱 따뜻했다. 사람이 이렇게도 포근하고 따뜻하구나.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요?”
“...”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푹 안겨있던 종대의 몸이 경수에게서 살짝 멀어졌다. 종대의 의지가 아닌, 경수가 힘주어 종대와 자신 사이에 작은 틈을 만들었다. 어깨를 감싼 손은 그대로였지만 경수의 어깨에서 멀어지게 된 종대의 이마가 벌써부터 한기를 느껴왔다. 경수의 몸이 남들보다 따뜻한 걸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안겨본 적이 없으니 이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이따위의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아이러니했다. 이만 고개를 들어 올리려 눈을 경수에게 돌렸을 때 경수가 담백하게 종대의 이마에 키스했다. 소리도 나지 않았던 버드키스였다. 작게 다가온 입술은 떨림조차 없었다. 떨려오는 손을 숨기려 종대는 더욱 힘주어 주먹을 쥐었지만 감출 방법이 없었다.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종대의 눈에 눈물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가득히 채워진 눈물로 경수를 보았을 때 경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꼬리를 살짝 접고 이를 내보인, 근사한 웃음이었다. 

 

“이렇게요?”

 

  종대는 주먹 쥔 손으로 경수의 어깨를 힘주어 밀어낸 후 정신없이 경수의 집에서 뛰어나왔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만큼 뛰어나왔다, 라고 느꼈을 때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비싼 집들이 줄지어 있는 높은 담장 사이에 종대는 퍽 처량해 보였다. 무릎을 모아 앉은 종대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지 않았다.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

 

 

  눈을 다시 떴을 땐 누런 벽지가 종대를 반겼다. 아무것도 없는 매트릭스와 텅 빈 작은 방이 오늘따라 더욱 낯설었다. 느리게 일어난 종대가 짐을 챙겼다. 챙겨야 하는 것은 따로 없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방을 둘러보던 종대가 낡은 탁자에 올려져 있는 하얗고 작은 종이쪼가리를 발견했다. 그것을 주운 종대는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찔러 넣곤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떨려오는 손을 애써 무시한 채 방을 휙 뒤돌아보았다. 남아있는 건 없었다. 종대는 속삭였다. 이따 보자. 텅 빈 곳에서, 답은 듣지 못했다.
파티장 앞에 도착한 종대가 여전히 촌스러운 싸구려 셔츠의 깃을 다듬었다. 파란색 팔찌를 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지호가 사진을 몇 장 주었다. 사진 속에는 경수가 멋들어진 체크 슈트를 입곤 파티장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돌아오십쇼. ...예.

 

  조작된 T그룹 장남의 신분증을 내민 종대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샴페인을 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지시받았지만 여전히 이런 파티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자꾸만 호화로운 샹들리에라던가, 텔레비전에서 비리에 휩싸여 징역 몇 년을 받았다던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큰 유리로 되어있는 기둥에 살짝 기댄 종대가 장내를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 곳에서 경수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깔끔한 포마드 스타일링을 한 경수가 A그룹 막내라는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본 종대가 기대있던 등을 떼었다. 그리곤 귀에 있던 작은 인이어의 버튼을 눌렀다. 진행, 하겠습니다.

 

  지호에게 그 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지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면 지호는 서둘러 일을 진행하자며 자신을 룸 안으로 이끌곤 했으니까. 안에서는 밖이 보이고,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특수한 유리로 되어있는 룸이 낯설었지만, 최대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한 종대가 장비를 서둘러 챙겼다. 그저 이 일을 끝내고 쉬고 싶었다. 자신의 휴식처로 가 편히 쉬고 싶었다. 종대의 뒤에서 장비를 설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지호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작게 한숨 쉰 종대는 장비를 설치하는 것을 잠깐 멈췄다. 조금 쉬었다 해도, 지호가 오고 난 뒤에 해도 괜찮겠지. 룸 안에 있는 새까만 쇼파에 누운 종대가 팔로 이마를 가렸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또 다시 예민해진 감각은 애써 잊으려고 했던 기억들을 끌어왔다. 어제 있었던, 경수의 키스. 그것들을 잊으려 더욱 바쁘게 움직였던 것들이 소용없이 기억은 머리를, 몸을 천천히 잠식해왔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음은 함께한 점심과 저녁, 함께 맞았던 아침, 함께 있었던 그 행복한 시간들을 데려왔다. 눈물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이로 짓눌렀지만 종대는 이 눈물이 가져올 기억들이 기대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종대가 총을 집어 들었다. 경수를 찾으며 총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둔탁한 소리를 낸 총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경수는 마련되어있는 과일을 하나 집어 들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초점을 맞추려 눈을 찡그리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 번 흐른 눈물은 끝없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총을 잡은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손을 감출 방도가 없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였다. 종대는 눈을 꽉 감았다. 반짝이는 조명 옆의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어둠으로 밀어냈다.

 

내가 죽일 수 있을까,
하지만 해야만 해,
왜?
왜지?
내가 왜,
죽여야만 하는 걸까.

총을 내린 종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무릎 위로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

 


종대씨는 자신의 네임이 어떤 사람이였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저보단 다정하지 않을까요?

 

 

.

 


복도를 뾰족한 구두로 쿡쿡 찍으며 뻗는 다리가 지나치게 당당해보였다. 새까만 핸드폰에 수많은 별들이 박혀있는 그것은 반짝였음에도 소름 돋게 화려했다. 

 

“아, 예. 회장님. 아유, 뭘 이런 일을 걱정하고 그러세요. 네. 맞아요. 자신의 네임을 찾아버린 네임들은 쓸모가 없죠. 어차피 능력도 못쓰던데요. 교육을 안 시켜서 그런가. 아이고, 걱정 마세요. 어차피 쓸 곳 없는 능력이던데요. 번개라던가. 네. 그래도 그 그룹 의사였으니 다행이죠. 그 의사가 힘으로 우리 조직원들 때려죽일 땐 제가 더 소름이 돋았다니까요. 하하. 그래도 탈 없이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 예. 알겠습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지호는 웃음을 머금고 종대가 있던 룸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룸 안에는 설치하다 만 장거리 총만이 지호를 반겼다. 

 

“어.. 이게..”

 

 지호는 끊긴 전화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그 때,

 

 

화려한 음악 속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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