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에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찢어질 듯한 여자의 비명 그 어떤 것도 보호받지 못하는 버려진 도시. 그 가운데 섬광이 내려치고 모든 소리를 덮어 버릴 만큼 큰 번개가 내려쳤다. 순식간에 일대가 조용해졌다. 콧속을 찌르는 피 냄새는 더 역해졌지만, 소음은 사라지고 고요해졌다. 그 고요한 거리를 한 남자가 걸었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

 

 

모든 생명이 사그라졌다고 생각한 공간에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는 전류가 흐르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얼굴에는 신경질이 가득했다.

 

 

“피곤하군.”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면 분명 그것일 테니 시간이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소리는 뚜렷해졌다. 작은 소리라 집중이 조금이라도 깨지면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을 헤집고 나니 어린 소년이 있었다. 어린 소년을 내려 본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고 손을 들어 소년의 머리에 올렸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이고 머리가 울렸다. 그렇게 남자는 정신을 잃었다.

 

 

 

***

 

 

 

“…”

“…”

“…첸”

“김종대”

 

 

귀를 괴롭히는 시끄러운 소리에 종대는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얼굴을 찡그리고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지만, 이불도 금세 빼앗기고 말았다.

 

 

“변백현, 나 좀 자자.”

“일어나 할 얘기 있는 거 알지?”

“무슨 얘기 어제 일하고 와서 피곤한 거 알면서 이래야 돼?”

“평소라면 그랬겠는데 지금은 아니니까 빨리 일어나보라고.”

“어휴, 변백현 진짜.”

 

 

이불마저 뺏긴 종대가 귀를 막고 있던 베개를 치워내고 침대에 앉았다. 백현의 말 그대로였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아침을 맞이할 때면 며칠은 꼬박 앓아야 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온몸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전류가 흘렀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있어 고통도 몇 배는 더 심했고 그것을 피하고자 잠에 들 수도 없었다. 의사인 백현의 배려로 VIP 병동에 머물 수 있었지만, 화장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마저 귀를 괴롭힐 정도의 소음으로 느껴지는 터라 대충 아무 가이드를 붙잡고 잠을 자거나 백현이 놔주는 신경안정제에 의존해야 했는데 백현이 몇 번이나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잠에 빠져 있다는 거나 상쾌할 정도로 맑은 머리는 평소와 달랐다.

 

 

“나 왜 이러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또 너 혼자 나갔다 길래 걱정돼서 현장 가보니까 아주 쑥대밭이 되어있지 너는 찾아도 없지 거길 나 혼자서 뒤지고 뒤져서 찾으니까 너는 웬 어린놈 하나 끌어안고 쓰러져있지.”

“아, 그랬구나.”

“너 폭주한 줄 알고 가이드센터에 또 연락해야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데 넌 또 멀쩡하지, 뭔데. 쟤.”

“어…”

 

 

백현이 곁눈질한 곳을 보자 그때 그 어린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급하게 가져다 놓은 듯한 간의 침대에 누워 숨만 쉬고 있는 어린 소년을 본 종대는 한숨을 쉬었다.

 

 

“가이드겠지?”

“그러니까 무슨 가이드, 네가 현장에 가이드를 달고 나갔을 리도 없고, 뭐냐고 쟤.”

“현장에서 발견됐어.”

“뭐?”

“그러니까, 쟤 그거라고, 뱀파이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뱀파이어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숨어 지냈는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먹어치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세상에 드러났고 평범하지 않아 배척당했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그들을 뱀파이어로 불렀다. 사람의 피를 먹는 두려운 존재.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그들은 잔인하게 사냥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뱀파이어를 사냥하는데 선봉장이 된 건 센티넬이었다. 뱀파이어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지도 않고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

 

 

센티넬 역시 처음엔 연구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간은 잔인했고 인류의 평화와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센티넬들은 실험체가 되어 죽어갔다. 한두 명씩 발견이 되던 센티넬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권력이라는 것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월등한 인간. 그게 바로 센티넬이었고 인간은 더는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센티넬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전 세계 각국에서는 센티넬 부대를 설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부대를 세우고 운영이 안정화 된 나라의 주도하에 이제는 센티넬 부대를 만들 수 없도록 조약이 생겼다. 그만큼 센티넬의 힘은 강해졌고 그들의 지위도 높아졌다. 센티넬에게 우위를 빼앗긴 인간들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 저들과 다른 자에게 또다시 위치를 빼앗기는 게 두려웠고 그래서 센티넬과 손을 잡았다.

 

 

평화와 안정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실체는 사실상 사냥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뱀파이어를 센티넬의 능력으로 제압했다. 뱀파이어는 점점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뱀파이어 관련 범죄가 일어났고 범행이 일어나는 장소는 언제나 치안이 좋지 않은 버려진 곳이었다.

 

 

경수는 그곳에서 발견됐다. 인간이고 뱀파이어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다 해치워 버리는 종대가 출동을 나갔던 곳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교복을 입고 있던 소년은 뱀파이어에게 목이 뜯긴 채 겨우 숨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종대의 가이드였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모든 센티넬과 가이드는 국가에 소속되어 관리가 되었지만, 빈민층에서 태어난 센티넬과 가이드는 누락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수 역시 그런 케이스였다.

 

 

모든 센티넬이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 가이드는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공격형 센티넬은 다른 유형의 센티넬보다 몇 배는 가이드의 역할이 중요했다. 능력이 발현된 뒤 3개월, 길게는 1년 안에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찾을 수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종대에게 맞는 가이드를 찾기까지는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경수가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야.

 

 

백현은 종대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다. 가이드가 없어서 종대가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는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왔기에 종대를 설득해 경수의 존재를 숨겼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

 

 

 

종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깨어났다. 손을 뻗어 침대를 더듬거려도 잡히는 건 이불뿐이라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머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경수가 제 옆에서 떨어지니 몸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불과 3년전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일상이었는데 경수가 종대 옆에 나타난 뒤로는 조금만 경수와 떨어져도 이렇게 티를 내는 몸에 쉽게 짜증이 났다. 그만큼 경수에게 익숙해진건가 싶어 헛웃음 나면서도 깨질 듯이 울리는 머리부터 일단 해결하자 싶어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방 밖으로 나갔다. 뭘 그렇게 하는지 바쁘게도 뚝딱거리며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경수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자 그제야 시선을 느낀 경수가 뒤를 돌아봤다.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 종대의 표정에 아차 싶은 경수가 종대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왜 나와 있어.”

“밥 먹어야 하잖아요.”

“밥 필요 없어. 나 일어날 때까지 어디 가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요. 더 잘래요?”

“아니, 그냥 좀 쉬고 싶어.”

 

 

경수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는 몸 상태에 종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제도 종대는 홀로 출동을 했다. 종대는 늘 단독행동을 했고 필요 이상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건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한 동네가 잿더미가 되었다. 피를 잔뜩 묻히고 돌아온 종대는 현관에게 경수와 마주 보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지금 입고 있는 보드라운 니트로 갈아입히고 좋은 향이 나는 바디워시로 몸을 닦아낸 것도 경수였다.

 

 

암막 커튼으로 빛을 차단한 거실 소파에 앉아 경수에게 몸을 기댄 종대는 경수를 빤히 들여 봤다. 고작 3년 사이에 많이도 자랐다고 생각했다. 대게 뱀파이어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숨을 쉬고 움직이고 깨어있지만 죽은 존재나 다름없는 그들의 몸은 자라지 않았다. 그런데 경수는 착실하게 성장을 해갔다. 키도 크고 손도 커지고 얼굴도 소년에서 남자가 되었다. 경수를 문 뱀파이어가 감염 형이 아닌가 싶어 백현에게 부탁해 검사도 해봤지만, 경수는 틀림없는 뱀파이어였다. 그것 말고도 이상한 점은 많았다. 경수는 다른 뱀파이어처럼 피를 마시지 않았고 빛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낮에 좀 많이 피곤해하는 게 전부였다. 뱀파이어를 죽이고 온몸이 피에 절은 채 들어와도 동요 없이 늘 언제나와 같았다.

 

 

“너는, 내가 너와 같은 뱀파이어를 죽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상관없어요.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나랑 상관없는 것들이잖아요.”

“너는 왜 나를 물지 않아?”

“…”

“난 네가 내 목을 깨물고 내 몸속 피를 다 마신다 해도 그 순간에도 안정을 느낄 거야.”

 

 

잠에 취한 목소리에 겨우겨우 한 마디씩 얘기를 마친 종대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 종대의 어깨를 끌어안은 경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종대의 길고 하얀 목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 가는 목을 물어뜯을 날이 올까? 답은 아니오. 였다. 종대가 느끼는 감정은 경수 역시 느끼는 것들이었다. 처음 종대의 집에 오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언제 종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만큼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뱀파이어인 저는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만약 죽어야 할 날이 오면 저를 이 세상에서 없애는 건 꼭 종대여야 한다고.

 

 

요즘 들어 갈증이 심해진 것도 낮에 더욱 피곤해진 것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다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치안이 좋은 도시에 고층 아파트단지, 그곳에 자꾸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도, 깊게 잠든 종대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 들리는 이명 같은 것들도 다.

 

 

꼭 감은 두 눈에 숨겨져 있는 맑은 눈이나, 여린 어깨와 팔목, 그다지 크지 않은 제 품에도 쏙 들어올 정도로 작고 여려 보이는 이 사람이 밤이면 한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게 무섭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원해서 가진 게 아닌 능력이란 다 그랬다. 인간을, 뱀파이어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람이 제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고 여려진다. 주체가 되지 않는 힘에 괴로워하며 제 손길을 원하고 조금이라도 더 닿길 원한다. 날 죽일 수도 있는 사람, 내가 죽일 수도 있는 사람. 이상한 관계.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곳이 최고의 안식처 같은 그런 관계.

 

 

늦은 오후가 돼서야 종대가 일어났고 그 옆에서 깜빡 잠이 든 경수도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다. 경수가 집에 오고 난 뒤 더는 병원을 찾지 않게 된 종대를 보러 백현은 주기적으로 집에 들렀다. 익숙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집으로 들어서던 백현은 집안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주변을 둘러봤다. 경수를 보고 종대를 봐도 늘 보던 그 모습 그대로 이상한 점이 없어 제가 잘못 느낀 건가 생각했지만 최근 이 일대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건 센터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센티넬들이 역으로 공격을 당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고 안전지대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들이 생겨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현은 종대가 걱정됐다. 홀로 현장에 나가는 종대는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과거의 사건으로 뱀파이어를 증오하게 된 종대는 늘 무리를 했다. 그만큼 폭주하는 주기도 잦았다. 지금은 경수가 있어 가이딩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능력을 기준치 이상으로 쓰게 되면 폭주는 피할 수 없었다. 백현은 경수와 종대의 뒷모습을 봤다. 어제도 건물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온 종대는 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빼면 꽤 멀쩡해 보였다. 종대의 손을 잡고 있는 경수의 손을 본 백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안 좋은 생각들을 지우려 했다.

 

 

“어제 손 잘 잡고 잤어?”

“그래. 보시다시피 멀쩡하잖아.”

“그러지 말고 아예 섹스하면…”

“조용히 해라.”

“나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센티넬이랑 가이드면서 뭘 그렇게 내외를 해? 손잡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안정이 되면서 더 깊은 교감을 하면 완전 멀끔해질 걸 고작 해봐야 키스라니.”

 

 

혀를 쯧쯧 차는 백현의 말에 경수의 뒷목이 벌게졌다. 그걸 본 종대는 차가운 손으로 경수의 뒷목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체온이 손에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되는데 뭐 하러 더 하느냐고. 이 어린애랑.”

“경수도 이제 성인이거든 너나 경수나 보기엔 매한가지야. 이건 네 주치의로서 조언하는 거라고.”

“…”

“요즘 이 동네 흉흉하다니까 너도 좀 조심하고. 경수 넌 이상한 거 있음 숨기지 말고 얘기하고.”

“알았으니까 제발 꺼져라.”

“간다, 가.”

 

 

백현이 검사를 위해 꺼내뒀던 도구들을 가방에 넣으며 일어났다. 아직도 손만 꼭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현관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 두 사람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진짜, 그냥 내 얘기 넘기지 말고 잘 생각해봐.”

“알아서 할 테니까 가라 좀.”

 

 

끝까지 툴툴거리는 백현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낸 종대가 다시 경수의 손을 잡았다.

 

 

“백현이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

“그냥 하던 대로 해. 그거면 돼.”

“알았어요.”

“피곤하다. 들어가자.”

 

 

손을 놓고 돌아들어 가는 종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운 경수가 종대의 입술의 제 입술을 가져댔다. 뒷목을 감싸 쥐고 입술을 물고 핥았다. 혀를 세워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종대의 혀를 찾았다. 종대도 경수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적극적으로 응했다. 기분 좋은 쾌감과 안정이 동시에 몰려왔다. 놀라울 정도로 상쾌한 정신과 가뿐한 몸에 종대는 경수를 더 꽉 끌어안았다.

 

 

 

***

 

 

 

오랜만에 일이 없었다. 며칠째 뱀파이어들의 움직임도 잠잠했고 센터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며 예의주시하고 있던 현상도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그 덕에 종대 역시 오랜만에 쉴 수 있었다. 늘 예민하게 구겨져 있던 미간도 펴졌고 기분도 좋았다. 경수와 함께 장을 보고 돌아와 오랜만에 부엌에 들어왔다. 늘 경수가 해준 밥을 먹거나 대충 빵으로 때우곤 했지만, 몸 상태가 좋으니 입맛도 돌았다. 도와준다는 경수를 만류하고 혼자 식재료들을 다듬었다. 채소들을 씻고 고기도 꺼내놓고 인터넷으로 레시피도 찾아봤다. 기분이 좋으니 그간 신경 쓰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였다.

 

 

처음 경수가 집으로 왔을 때 종대는 그저 제 상태를 안정시켜주는 물건을 대하듯 경수를 대했다.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 같은 제 상태에 집에 오자마자 경수를 끌어안았고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괜찮아지면 경수에게서 떨어져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종대에게 경수는 제 가이드이기 전에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종대가 제 눈에 띈 뱀파이어를 살려두는 일은 없었다. 백현의 만류로 살려두면서 제 가이드로 쓰고 있긴 하지만 언젠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기묘한 동거가 1년을 넘어가던 어느 날 종대는 평소처럼 피를 뒤집어쓴 채 집으로 돌아왔다. 눈에 핏발이 다 선 채로 경수 위에 올라타 경수의 목을 졸랐다.

 

 

“다 죽어야 돼. 너 같은 새끼들은 전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이 빠지고 옆으로 픽 쓰러져서도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몸에 경수는 평소 백현이 당부한 대로 연락을 했지만 그런 종대를 살릴 수 있는 건 고작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백현은 너만 걔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경수는 제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종대에게 발견된 후 처음 알았다. 뉴스에서만 보던 센티넬이니 가이드니 하는 것들이 제 삶이 될 줄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센티넬과 가이드는 교육을 받았고 그들은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배웠다. 접촉, 그리고 더 큰 교감. 맞닿는 면적이 더 클수록, 더 깊을수록 효과는 크고 빠르다. 센티넬과 가이드에게 접촉이란 그저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경수는 달랐다. 19살 소년이 받아드리기에는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백현이 처음 사람 좋게 웃는 얼굴로 시스템에 관해 설명을 할 때 경수는 내내 넋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경수는 그 날이 생각났다. 가이드로써 센티넬에게 해야 할 것, 폭주한 센티넬이 어떤 것에 안정 하게 되는지를 들었던 날,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얘기들.

 

 

종대가 몸부림을 칠수록 맑기만 하던 밤하늘에서는 낙뢰가 떨어졌다. 손톱을 세워 제 목을 박박 긁고 머리를 쥐어뜯는 종대를 보며 경수가 처음으로 먼저 종대에게 손을 댔다.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얇은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자 처음 태어난 강아지가 제 어미의 젖을 빨 듯 경수의 입술을 물고 몸을 들썩거리는 종대를 경수는 더 꽉 끌어안았다. 그 날은 종대가 발현한 뒤 처음으로 뱀파이어를 놓친 날이었다. 그 이후 두 사람 사이에 키스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말 없는 경수는 종대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고 그저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저와 같은 뱀파이어를 몇십, 몇백 명씩이나 죽여 대는 종대를 괴물 보듯 보지도 않았고 뭘 귀찮게 얘기하거나 따져대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었다. 김종대, 첸을 위한 가이드로써.

 

 

경수는 티 나지 않게 종대의 삶에 스며들었다. 그건 종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했지만 필요로 했고 원했다. 늘 자신은 어딘가에 져버린 채 종대를 위해 살고 있는 경수를 알면서도 늘 모르는 척했기에 종대는 경수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게 비록 경수는 늘 하고 있는 밥을 만드는 것일지라도. 경수는 종대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정신 사납다는 종대의 타박에 겨우 소파에 앉아 목만 길게 빼고 종대를 관찰했다.

 

 

“아!”

 

 

그때, 채소를 손질하던 종대가 칼에 손을 베였다. 놀란 경수가 종대에게 다가가 다친 손가락을 살피기도 전에 몰려오는 두통에 무릎이 꺾였다. 눈앞이 하얘지고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갈증이 밀려왔다. 콧속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들어와 헛구역질이 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겨우 다리에 힘을 줘 화장실에 틀어박힌 경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화장실 밖에서는 쾅쾅거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종대가 있었지만 문밖에 있는 종대의 피 냄새가 너무 강하게 느껴져 코를 틀어막고 샤워기에 찬물을 틀었다. 며칠 전부터 잠잠하던 이명이 다시 시작됐다. 온몸에 스파크가 튀며 전류가 흐르는 종대의 몸을 끌어안을 때도 느껴지지 않던, 처음 느껴보는 큰 고통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대로 그 차가운 물을 맞으며 앉아있었다.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는 경수의 안색이 창백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수에 종대가 힘을 써서 억지로 문을 열어냈을 때 경수는 이미 기절해있었다. 백현을 불러 간단한 진찰을 받으면서도 종대의 걱정스러운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혹시 제 능력을 몸으로 흡수하다가 잘 못 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간혹 있는 일이었다. 너무 강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의 기운을 받아들이다가 가이드가 죽는 경우.

 

 

“저체온증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은 거지?”

“응. 지금은. 그래도 언제 한 번 경수랑 내 병원으로 와. 검사할 것도 좀 있고.”

“그래. 알았어.”

 

 

누워있는 경수를 내려다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는 종대의 어깨를 두드린 백현이 급한 일이 있다고 집을 나섰다. 경수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자세를 낮춘 종대가 경수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손으로 다시 집어본 이마에는 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종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아플 때, 폭주할 때 경수가 해주는 것처럼 할 수 없는 저 자신이 싫었다. 언제나 저는 지키고 싶은 것들은 지킬 수가 없다.

 

 

 

***

 

 

 

그 날 이후로 경수는 또 잠잠했다. 갈증을 느끼지도 않았고 이명 역시 멎었다. 종대와 함께 백현의 병원으로 가 여러 검사를 받고 나오면서도 종대는 경수를 지긋이 바라만 볼 뿐 뭐라 말을 꺼내진 않았다.

 

 

언제나처럼 종대는 밤마다 뱀파이어 사냥을 나갔고 어김없이 잔뜩 지쳐서 들어온 종대를 경수는 끌어안았다. 오늘 역시 그런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집을 나서는 종대는 늘 깜깜한 한밤중에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늘은 까만 밤이 지나고 날이 점점 밝아올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경수가 거실 창문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종대가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놀란 경수가 뛰어다가 종대를 잡기도 전에 어디서 나온 건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뱀파이어들이 종대 주변을 둘러쌌다. 종대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다 그보다 더 뒤에 멈춰선 경수를 보곤 픽 힘없이 웃었다. 종대를 둘러싸고만 있던 뱀파이어중 하나가 종대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에 손을 댔다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쓰려졌다. 마른하늘에선 천둥소리가 났고 그 순간 번개가 내리쳤다. 종대 주변을 둘러싼 뱀파이어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쓰려졌다. 그 시체들을 내려다보던 종대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경수를 봤다. 뚜벅뚜벅. 발에 채이는 시체들을 발로 밀어낸 종대가 경수 앞에 섰다. 경수는 얼른 종대의 몸을 끌어안았지만, 종대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종대의 상태는 제 능력을 제어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종대를 등에 업고 집으로 올라가면서도 하늘에선 몇 번이나 번개가 내리쳤다. 종대의 몸은 더 뜨거워져갔고 경수와 아무리 몸이 맞닿아있어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침대에 종대를 눕히고 옷을 다 벗겨내고 제 옷도 벗은 뒤 끌어안아도 아무리 혀를 깊숙이 넣어 키스를 해도 종대의 괴로움을 사그라지지 않았다. 정신은 깨어있지만 제정신이 아닌 종대는 계속 몸을 버둥거리며 괴로워했다. 경수는 종대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허벅지 위로 올라타 종대의 양어깨를 눌렀다. 종대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이곳저곳에 입술을 옮겼다. 혀를 내어 종대의 몸을 핥고 깨물고 만졌다. 이를 세워 민감한 곳을 물고 안쪽 여린 살을 핥았다. 종대의 페니스를 잡고 자극을 주면서도 끊임없이 종대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혹시 더 괴로워하지는 않는지, 가이드가 센티넬을 가이딩할 때 가장 확실하고 효과가 좋은 방법이 섹스라는 것은 백현에게 질리도록 들었으면서도 평범한 가이드와 다른 제가 혹시 종대에게 해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을 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씩 호흡이 안정되어가는 종대에 조금 안심을 하면서도 그와 함께 커지는 성욕이 경수를 흥분하게 했다. 종대를 만지면서 같이 부풀어 오른 제 페니스를 종대의 뒤에 맞춰 넣으면서 경수는 다시 갈증을 느껴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목을 물어뜯고 싶지만 대신 제 팔뚝을 물고 허리를 움직였다. 엉덩이 근육에 힘이 들어가 뻣뻣이 설 정도로 격하게 움직이며 종대를 탐했다. 경수의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종대는 점점 안정이 되어갔다. 이제는 정상호흡으로 돌아온 종대를 보며 사정감을 느낀 경수는 종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물고 잘게 떨었다.

 

 

종대의 안에서 제 것을 빼내면서 함께 딸려 나온 정액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미끈거리는 하얀 액체, 아직도 종대 몸속에 제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편안하게 잠든 종대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히고 손을 씻으면서 제가 물어뜯었던 팔뚝을 봤다.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숱한 생각들을 다 모르는 척하고 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달음에 달려온 백현은 종대의 상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결국 했네.”

“네.”

“바깥에, 그것도 종대가 그런 거야.”

“네.”

“너, 요즘 상태 어떠냐.”

“…”

“종대는 오늘 보니 앞으로는 걱정 없을 거 같고, 너만 조심하면 되겠네.”

“…”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야. 용케 지금껏 버텼네. 김종대를, 첸을 위험하게 하지 마.”

 

 

백현이 하는 말들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종대를 제일 위험하게 할 것은 바로 저 자신임을 경수는 알았다. 종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신경안정제를 놓고나서도 걱정된 얼굴을 풀지 못하던 백현이 집을 나선 뒤 한참이 지나고나서야 종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도경수.”

 

 

팔로 눈을 가리고 있는 종대가 마치 우는 것 같았다.

 

 

“네.”

“난 이제 그만하고 싶어. 다 끝났어.”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종대의 손을 잡아 내렸다. 한없이 강해 보이지만 경수 앞에선 늘 약한 종대는 오늘 역시 그랬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난 뱀파이어에게 부모님을 잃었어. 두 분 다 뱀파이어에게 물려 돌아가셨지. 그 날은 내 생일이었어. 없는 형편에 내 생일 케이크를 들고 오시는 아버지가 바로 내 눈앞에서 뱀파이어에게 죽임을 당했어. 동네 사람들은 다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갔고 그러다 잡혀 목이 물려 뜯겨 나갔어. 어머니는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뛰어가다가…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어. 깨어보니 센티넬 센터 병원에 누워있더라고. 우리 동네에선 나만 살아남았어. 거기 있던 뱀파이어를 죽인 것도 살아남은 동네 사람들을 죽인 것도 나였어. 그 뒤부터는 계속 그렇게 살았지. 그러다가 3년 전, 너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새끼를 발견했어. 우리 아버지를 죽인 놈, 우리 어머니를 죽게 만든 놈.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있더군. 내 목표는 오로지 그 새끼를 발견해 죽이는 것뿐이었어. 그래서 널 이용했어. 그 새끼를 죽이기 전에 죽을 수는 없어서.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는 종대의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없어 경수는 종대의 손을 꼭 잡았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종대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종대는 몸을 편하게 경수에게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그저 쉬고만 싶었다.

 

 

그 일 뒤로 종대는 더는 능력을 사용하는 일 없었다. 저 스스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폭주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늘 경수의 옆에 있었다. 경수는 여전히 이따금 이명에 시달리고 타는 갈증을 느꼈다. 경수는 그런 일들을 종대에게 숨기지 않았다. 종대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죽여도 된다며 목을 내미는 경수를 끌어안고 말뿐이었다. 화장실에 틀어박혀 고통을 삼키는 경수를 종대 역시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센터에서는 중요인력인 종대와 연락이 두절된 후 난리가 났다. 여전히 뱀파이어가 동네에 출몰했고 그 처리는 다른 센티넬의 몫이 되었다. 균형이 깨지고 불안정해진 바깥과는 다르게 경수와 종대의 안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동료들이 그 일상을 깨기 전까지는.

 

 

평소처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오던 순간 소리도 없이 뒤를 따르던 뱀파이어들이 경수의 뒷목을 물었다. 깜짝 놀라 손을 놓치게 된 두 사람은 순식간에 뱀파이어들에게 가로막혀 떨어졌다. 지키고자 하는 건 늘 지킬 수 없다. 제 손에 경수가 잡히질 않으니 빠르게 심박 수가 높아진 종대의 손에서는 스파크가 튀었다. 뱀파이어에게 목을 물린 경수 역시 눈이 뻘게지고 이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종대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목적이 이것뿐이었는지 뱀파이어들은 황급히 현관문을 빠져나가다가 오랜만에 능력을 쓴 종대의 손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경수와 종대는 서로를 한발자국 떨어진 상태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시끄럽게 벨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백현이었다. 센터와 연을 끊고 살면서도 종대가 경수의 상태를 걱정해 유일하게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이였다. 잔뜩 예민해진 귀로 백현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김종대 괜찮아?]

“뭐야, 변백현.”

[아 미치겠네.]

“변백현. 뭐냐고 제대로 말해.”

[아, 시발 모르겠다. 야 너 도경수 데리고 어디로든 피해. 지금 센터 사람들이 너희 집으로 가고 있어.]

“뭐?”

[죽이든 살리는 네 마음대로 해. 도망을 가던, 걔를 지금 죽이던.]

“끊어. 고맙다.”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마친 종대가 경수를 보고 간신히 웃는 얼굴을 했다. 제 눈앞에 있는 경수를 끌어안았다.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현과 통화를 할 때부터 세차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종대는 경수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마주했다.

 

 

“뱀파이어는 약해 빠졌어, 빛을 두려워하고 늘 숨어 지내지.”

“…”

“센티넬은 달라, 오히려 다들 센티넬을 두려워하니까.”

“…”

“인간은 자신과 다른 자를 혐오해, 자기보다 약한 자, 우리와 다른 자, 그런 자들은 늘 인간이라는 탈을 쓴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말아.”

“…”

“내가 너를 살릴 거야. 넌 내 가이드니까.”

 

종대와 눈을 마주한 경수의 눈엔 한치의 흔들림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내가 형을 살릴게요. 난 형 가이드니까.”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

 

 

 

 

백현은 뒤늦게 연락을 받은 장소에 도착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반쯤 무너져 내린 건물에는 검은 그을림과 재로 덮여있었다. 군데군데 널브러진 시체들은 제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어제만 해도 같이 커피를 마시며 농담을 주고받던 연구원이나, 가끔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오던 센티넬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그의 눈을 감겨준 백현이 종대와 경수를 찾았다. 이 건물을 빠져나가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백현이 정처 없이 건물을 뛰어다니다 닿은 막다른 골목에서 그 둘을 볼 수 있었다. 눈이 새빨개진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경수는 종대를 끌어안고 백현을 경계하고 있었고 그 품에 안긴 종대의 표정은 더도 없이 평안해 보였다.

안식(安息)

w. 라하 (@laaha_921)

bottom of page